미국 도널드 트럼프 2기 행정부의 무역정책이 '관세 우선주의'로 회귀하고 있다. 반도체와 AI산업을 중심으로 공급망 재편과 국내 생산확대 기조가 뚜렷하며 고율관세와 기술안보 강화조치가 잇따른다.
실제로 4월 초 무역확장법 232조에 따라 반도체 및 장비소재 수입이 국가안보에 미치는 영향을 조사하겠다는 발표가 있었다. 이는 반도체산업의 미국 내 생산확대를 노린 조치지만 글로벌 공급망에 혼선을 초래해 제조비용 증가와 기술혁신 지연이라는 역효과가 우려된다.
대표적 사례가 AI데이터센터 구축이다. 마이크로소프트, 구글, 메타 등 미국 빅테크는 올해 3000억달러 이상 투자해 고성능 컴퓨팅 인프라를 확충한다. GPU와 HBM은 한국·대만에서 생산되고 동남아에서 패키징과 테스트를 거쳐 미국에 도달하는 복잡한 공급망을 따른다. 다단계로 얽힌 공급망의 어느 한 고리에 관세가 부과되면 조달비용 상승은 물론 전체 일정이 지연된다. 속도와 비용이 핵심인 AI 경쟁에서 이는 큰 리스크가 될 수 있다.
이러한 관세정책은 미국뿐만 아니라 한국에도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다. 미중의 기술패권 경쟁에서 균형을 유지한 우리 반도체산업은 미국의 수출통제와 중국의 자립화라는 이중압박 속에서 입지가 흔들린다. 미국의 대중 AI칩 수출제한으로 한국의 대중국 반도체 수출은 1분기에 25% 가까이 감소했고 중국 내 점유율도 하락했다. 단가하락에 따른 수익성 악화와 함께 장기적으로는 R&D 투자위축도 우려되는 상황이다.
미국 내 반도체 생산확대를 위한 팹 건설도 순탄치 않다. TSMC와 인텔이 수십억 달러를 투입해 신공장을 짓지만 장비수급 지연과 숙련인력 부족, 인건비 상승으로 준공시점이 계속 미뤄진다. 반도체는 장비, 소재, 설계 IP 등 다층적 생태계가 맞물려야 완성되는 산업이다. 관세는 수입을 줄이는 단기적 효과보다 글로벌 반도체 생태계의 효율성과 혁신역량을 훼손하는 장기적 손실이 더 크다.
반도체 공급망은 미국, 일본, 네덜란드, 한국 등 기술동맹국들의 긴밀한 공조 없이는 안정적으로 운영될 수 없다. 트럼프식 '미국 우선주의'는 동맹국의 신뢰를 약화하고 반도체 공급망 재편에 필요한 국제적 연대마저 흔든다. 반면 중국은 정부 주도로 빠르게 기술격차를 좁히며 자국 내 반도체 생태계를 강화한다.
결국 문제는 정책의 방향성이다. 미국이 진정으로 반도체 패권을 유지하고자 한다면 관세라는 회초리보다 R&D 지원, 국제협력, 인재양성과 같은 정공법이 필요하다. 반도체는 단기적인 손익을 넘어 경제안보와 직결된 전략산업이다. 미국이 취하는 보호주의적 조치가 자칫 글로벌 기술혁신의 속도를 둔화시킬 수 있으며 그 여파는 한국을 포함한 동맹국 모두에 부담으로 작용할 것이다.
이제는 '더 많은 관세'가 아니라 '더 나은 전략'이 필요한 때다. 첨단산업 경쟁에선 물리적 장벽보다 유연한 정책과 글로벌 연대가 더 강한 힘을 발휘한다. 관세장벽은 중국을 견제하기보다 오히려 미국과 동맹국의 경쟁력을 갉아먹는 부메랑이 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