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 2인자의 조건

오동희 기자
2025.11.08 14:40

[오동희의 思見(사견)]

30일 서울 삼성전자 서초사옥의 깃발이 펄럭이고 있다. 삼성전자가 30일 연결 기준 매출 86조1000억원, 영업이익 12조2000억원의 올해 3분기 실적을 발표했다. 전사 매출은 전분기 대비 15% 증가하며 역대 최대 분기 매출을 기록했다. .2025.10.30. /사진=뉴시스 권창회

"올 연말 삼성 사장단 인사는 어떻게 됩니까?"

"앞에 있는 인사팀장에게 물어보세요."

약 1주일 전 저녁, 서울의 한 상가(喪家)에서 만난 정현호 삼성전자 부회장과 기자의 대화 중 일부다. 정 부회장은 상가 테이블 맞은편에 앉은 주창훈 부사장(사업지원TF 인사팀장)에게 바통을 넘겼고, 주 부사장은 "잘 모릅니다"라며 함구했다. 그로부터 1주일 뒤, 삼성의 '넘버2' 자리가 8년 만에 바뀌었다.

정 부회장이 용퇴를 결정했다는 게 삼성 측의 설명인 점을 감안하면 당시 정 부회장은 다가올 자신의 인사 변화를 알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제 그의 자리는 박학규 삼성전자 사업지원실장(사장)이 넘겨받았다. 기업에서 2인자란 왕조의 재상처럼 '일인지하 만인지상(一人之下 萬人之上)'의 위치다.

삼성 창업주 호암 이병철 회장 시절엔 비서실장이, 2대 회장인 이건희 회장 때는 비서실장·구조조정본부장·전략기획실장·미래전략실장이 이름을 달리하며 그 역할을 맡았다. 이재용 회장 체제에서는 사업지원TF장이 지난 8년간 그 자리를 이어받았고 이번 인사로 '사업지원실장'이 그 지위를 공식적으로 승계했다.

삼성의 넘버2 자리는 언제나 영광과 고난이 함께하는 자리다. 호암 시절 12년간 비서실장을 지낸 소병해 실장, 이건희 회장 곁에서 11년을 지킨 이학수 실장, 그 뒤를 이은 김순택 실장과 최지성 실장 모두 삼성의 영광과 굴곡을 함께했다.

여러 논란에도 불구하고 이학수 실장은 냉철한 지략으로 구조조정과 글로벌화의 기초를 닦은 '지장(智將)'으로, 초대 미래전략실장이었던 김순택 실장은 짧은 재임 기간이었지만 이 실장의 장기 집권 후유증을 정리하며 새 도약을 위한 조직 안정을 꾀한 '덕장(德將)'으로 평가받는다.

반도체와 휴대폰을 세계 1위로 끌어올리는 데 기여한 '용장(勇將)' 최지성 실장은 강한 추진력으로 삼성을 또 다른 초일류 단계로 끌어올리는 데 혁혁한 공을 세웠지만, 그 과정에서 '열심히 일한 이유'로 거의 모든 이슈에 연결돼 아직까지 재판에 얽매여 있는 신세다.

삼성호의 2대 선장이었던 이건희 회장은 이들을 때로는 죄고, 때로는 풀며 '거함 삼성'을 몰았다. 회장과 컨트롤타워·계열사 CEO의 삼각 편대로 운영되던 삼성은 권한과 책임을 현장에 두었기에 다른 그룹들보다 더 빠른 성장을 할 수 있었다.

컨트롤타워의 수장은 회장의 경영철학을 현장에 전파하는 메신저이자, 그룹의 업무를 조율하는 역할을 했다. 회장의 신임과 냉정한 판단이 필요한 자리였다.

2014년 5월 이건희 회장이 급성심근경색으로 쓰러진 뒤 위기의 삼성호(號)를 이끄는 이재용 회장을 보좌한 사람이 정 부회장이다. 그는 이 회장이 재판 등으로 어려움을 겪을 때 그룹의 불확실성을 최소화하는 '리스크 관리'에 초점을 맞춰 사업지원TF를 이끌었다는 평이다.

2인자의 자리는 '결과로 말하는 자리'다. 지난 8년간 삼성에 부침이 있었지만 그에 대한 평가는 아직 현재 진행형으로 시간이 더 필요한 문제다. AI 시대에 대한 대응이 적절했는지의 여부는 이제부터 나타나는 결과로 평가받게 된다.

이제는 후임자의 시간이다. 새로 사업지원실 수장에 오른 박 사장은 꼼꼼하고 판단이 빠르면서도 주장이 강하지만 자신의 주장만을 고집하거나 강요하지는 않는 '유연한 리더십'을 갖췄다는 게 그와 함께 일했던 선배들의 이야기다.

삼성이라는 거대한 조직에서 균형 감각은 큰 자산이다. 삼성의 2인자는 단순히 그룹을 관리하는 자리가 아니다. 총수의 생각을 현실로 옮기고 계열사 간 이익을 조율하며 외부의 거대한 변화를 읽는 자리다.

이 자리는 말하는 자리가 아니라 듣는 자리이며, 책임을 묻는 자리이기보다는 책임을 지는 자리이고, 결정을 기다리는 자리이기보다는 결정을 내리는 자리다. 조직의 목소리, 시장의 신호, 그리고 주주의 이익에 충실해야 하는 자리다.

호암 이병철 회장이 생전에 가장 강조한 덕목은 '경청'이었다. 사람은 말로 실수하지만, 듣는 사람은 실수하지 않는다. 시대는 변했고 시장은 더 냉정해졌다. 그러나 2인자의 본질은 변하지 않았다. 경청하고, 조율하며, 묵묵히 책임지는 자리다. 삼성의 2인자가 금과옥조로 삼아야 할 조건이다.

오동희 산업1부 선임기자(국장대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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