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 시대에도 경험디자이너는 필요하다[투데이窓/박영선]

박영선 전 중소벤처기업부 장관
2026.05.22 02:00

AI, 인간 디자인·설계작업 대체하지만
데이터 뒤 인간의 감정·맥락 이해못해
경험디자이너 수요 앞으로 더 커질 것

스마트폰 앱을 열었을 때 버튼이 어디 있는지 헤매지 않았다면, 병원에서 접수를 마치고 진료실 앞까지 자연스럽게 걸어갈 수 있었다면, 편의점 무인계산대 앞에서 당황하지 않았다면 경험디자이너의 손길이 이미 스쳐간 것이다.

경험 디자이너(Experience Designer)는 사람이 어떤 서비스나 공간, 제품을 사용하는 전 과정을 설계하는 사람이다. 단순히 겉모습을 예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이 순간 어떤 감정을 느끼는가", "어디서 막히는가" 등을 연구하고 그에 맞는 흐름을 만든다. UX(사용자 경험) 디자이너라고도 불리며, 디지털 앱부터 공항 동선, 병원 대기실, 쇼핑몰 배치까지 그 무대는 어디에나 있다.

그런데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경험디자이너가 손수 만들던 것들이 AI 도구로 대체되기 시작했다. 사용자 인터뷰 수백 건을 분석해 패턴을 찾는 작업, 다양한 화면 레이아웃을 시안으로 만드는 작업, 색상과 글꼴을 조합하는 작업들을 AI는 몇 분 만에 해낸다. 어도비(Adobe), 피그마(Figma) 같은 디자인 툴에는 이미 AI 기능이 기본으로 탑재됐다. "AI가 다 하는데 경험디자이너가 필요한가?" 라는 물음이 던져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 질문에는 중요한 전제가 빠져 있다. AI는 데이터를 분석하지만, 데이터 뒤에 숨은 인간의 감정과 맥락을 이해하지는 못한다.

한 노인이 키오스크 앞에서 머뭇거린다. AI는 여기서 버튼 크기를 키우거나 글씨를 키우라고 제안할 수 있다. 그러나 그 노인이 머뭇거릴 이유가 '버튼이 작아서'가 아니라 '실수하면 안 된다는 두려움' 때문이라면 해결책은 버튼의 크기가 아니다. "취소하고 다시 할 수 있어요"라는 안심문구 한 줄이다. 이 차이를 읽어내는 것은 아직 사람의 일이다. 경험디자인의 본질은 데이터가 아니라 AI는 취약한 공감이다.

영국의 공공서비스 디자인 기관 GDS(Government Digital Service)는 AI를 활용해 수천 명의 민원 패턴을 분석하지만, 현장에서 직접 시민을 만나 인터뷰하는 작업은 오히려 더 강화했다. "AI가 '무엇'을 말해줄 수는 있지만, '왜'는 사람이 물어야 한다"는 것이 그들의 결론이다.

한국에서 경험디자인은 아직 극소수의 영역에만 뿌리를 내린 상태다. 대형 IT 기업과 일부 스타트업에서는 UX 팀이 자리를 잡았다. 그러나 그 바깥을 보면 이야기가 완전히 달라진다. 전국 수만 개의 중소기업, 병원, 학교, 관공서, 지방자치단체에서 경험디자인은 사실상 존재하지 않는다. 민원 서비스는 여전히 사용자를 혼란스럽게 만들고, 병원 앱은 노인이 쓰기 어렵고, 공공 키오스크 앞에서는 매일 누군가가 당황한다.

기능은 있지만 경험은 없는 것이다. 그래서 블루오션이다. 경쟁자가 없다는 의미가 아니라, 수요는 이미 존재하는데 공급이 턱없이 부족하다는 의미다.

정부와 공공기관도 움직이기 시작했다. 행정안전부는 공공 디지털 서비스의 사용성 개선을 국정과제로 내걸었고, 보건복지부는 의료 디지털 전환에 속도를 내고 있다. AI 도입이 가속화될수록 "기술은 있는데 사람이 못 쓴다"는 문제는 더욱 선명해질 것이고, 그 문제를 푸는 경험디자이너의 수요는 지금보다 몇 배로 커질 것이다.

결론은 단순하다. AI는 경험디자이너를 대체하지 않는다. 기술이 아무리 발전해도 인간은 여전히 감정으로 결정하고, 관계 속에서 의미를 찾으며, 경험으로 기억을 만든다. 그 경험을 설계하는 일은 사라지지 않는다. 오히려 AI 시대일수록, 인간다운 경험을 만드는 사람의 가치는 더 높아진다.

스마트폰 속의 작은 버튼 하나에도, 병원 복도의 안내판 하나에도 누군가의 불안과 기대와 안도가 담겨 있다. 그것을 읽어내는 일이 경험디자이너가 AI 시대에도 필요한 이유다. 비롯 경험디자이너 뿐만 아니라 다른직업도 해야하는 일의 성격이 바뀌는 것이다.

박영선 전 중소벤처기업부 장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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