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월 벨기에 브뤼셀. 약 30명의 유럽 정상들이 EU(유럽연합) 본부에 속속 모였다. 휴대전화 반입도 비서 동행도 금지됐다. 은밀하고도 솔직한 대화는 자정을 넘겨 이어졌다. '동맹'이던 미국과 유럽 사이에 무력충돌 위기가 치솟고 있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유럽에 안보 '무임승차'를 지적하는 걸 넘어 그린란드(덴마크령)를 미국이 갖겠다며 군사행동까지 시사했다. 프랑스는 덴마크군의 그린란드 방어에 병력을 지원했고 덴마크는 혈액과 의료 물자를 비축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예측불가였다.
반년이 지난 최근 월스트리트저널(WSJ)이 보도하면서 이 모임 사실이 알려졌다. 일부 참석자는 "테라피 나이트"라고 명명했다. 우리 식으로 '힐링의 밤' '치유의 밤' 정도일까. 그날밤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은 안보를 미국에만 의존하는 것은 더 이상 감당할 수 없는 위험이 됐다고 주장했다. 그는 "여기서 선을 그어야 한다"(물러설 수 없다)고 했다. 알렉상드르 드 크로 벨기에 총리는 유럽이 미국의 "노예"가 될 위험에 처해 있다고 말했다.
보도에 따르면 이처럼 '존립 위기'를 겪는 유럽에 양극단의 전략이 공존한다. 각각의 방향을 대표하는 인물이 있다. 네덜란드 총리 출신인 마르크 뤼터 나토(북대서양조약기구) 사무총장은 트럼프 달래기를 도맡았다. 모든 성과를 트럼프의 공으로 돌리며 '아부(플래터리) 외교'에 거리낌없다. 유럽의 방위비 증액, 이를 통한 미국산 무기구매도 그 일환이다. 지난주 튀르키예에서 열린 나토 정상회의는 무난하게 종료됐다.
반대쪽엔 '자강론'이 있다. 마크 카니 캐나다 총리가 대표적이다. 그는 골드만삭스에서 근무했고 영국 중앙은행(영란은행·BOE) 총재를 지내는 등 유럽 사정에 밝다. 런던에서 쓰던 전화번호를 살려두고 유럽 정상들과 직접 소통하는 걸로 알려졌다. 카니 총리는 당시 회동에 없었지만 꾸준히 "우리가 아는 미국은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고 유럽 정상들을 설득했다.
어느 방향도 완벽하진 않다. 뤼터의 '아부 외교'는 시간을 버는 효과는 있다. 하지만 점차 효과가 줄어들어 단기처방일 뿐이라고 유럽 정부들은 분석한다. 그렇다면 유럽은 자신의 안보를 스스로 보장해야 하고, 미국의 지원이 언제든 끊길 수 있다는 전제 아래 국가를 운영해야 한다. 이것도 쉽지 않다. 막대한 재정이 들고 기술자립도 단기간에 이루기는 어렵다.
어쨌든 미국의 변화는 트럼프 임기를 넘어 장기간 지속될 게 확실해 보인다. 미국이 약해지는 것도 아니다. 앞으로도 상당기간 '슈퍼파워'일텐데 유럽에게 냉랭한 초강대국이란 사실이 유럽의 불안요인이다. 유럽은 이미 재무장에 나섰다. 일거리가 없어 놀리던 자동차공장에서 무기를 생산토록 하고 국가간 안보협력도 활발하다. 뒤늦게라도 우주항공, 인공지능(AI) 분야에 대한 투자를 늘리고 있다.
예전같으면 미국과 '시스템 통합'이 유럽에 유리한 전략이었다. 앞으론 미국 기술 및 금융 인프라에 대한 의존도를 줄이려 한다. 유럽 여러 나라들은 공공부문이 마이크로소프트(MS) 오피스나 줌을 쓰던 일상 서비스 영역에 유럽 제품을 쓰도록 하고 있다.
대한민국의 길과 유럽의 길은 다를 것이다. 그러나 국제질서의 운영체계(OS)가 대전환하는 데서 아무도 예외가 될 순 없다. 세계를 보는 우리의 시선과 국가전략의 '업그레이드'가 시급하다. 유럽 정상들의 긴박한 회동은 그 사실을 일깨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