족발동네, 흔한 공원?… 항일유적 '장충단'을 아시나요

김민중 기자
2015.08.11 05:15

[광복 70년 쇠락한 항일운동 유적-①] 장충단

[편집자주] 우리 주변에는 일제의 잔재가 그대로 남아 있는 항일 유적지들이 많다. 서울 한복판에도 영욕의 역사를 품은 채 새 건물에 가려 흔적조차 희미한 곳들이 즐비하다. 광복 70주년을 맞아 우리 일상에서 무심코 지나쳐왔던 쇠락한 항일 유적지를 찾아보고 잊혀진 의미와 복원 움직임을 조명해봤다.
항일 유적지인 장충단이 현재 장충동공원으로 남아 있다. 일제 때 공원으로 격하된 이래 해방 후 일부 복원됐지만 여전히 공원이다. /사진=김민중 기자

"장충동, 원조 족발집들 모여 있는데요?" - 대학생 민모씨(21·여)

"배호의 '안개 낀 장충단공원'은 알아요." - 회사원 김모씨(62)

서울 중구에 있는 장충단이 어떤 곳인지 묻는 질문에 시민들이 보인 반응이다. 교과서에 등장하지 않는 등의 이유로 시민들은 장충단을 족발동네, 일반 공원으로 알고 있지만 이곳은 서울 시내 대표적 항일 유적지다. 광복 70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일제의 잔재가 남아 있는 곳이기도 하다.

◇ 장충단, '을미사변 충신' 제사 지내는 사당… 일제 때 공원으로 전락

서울역사편찬원에 따르면 장충단은 1900년 대한제국 고종 때 지어진 사당이다. 1895년 을미사변 당시 명성황후를 따라 순국(殉國)한 충신들에게 제사를 지낼 목적으로 지어졌다. 이곳에는 일제에 항거하다 목숨을 잃은 충신들을 기리고 그 정신을 이어 받겠다는 숭고한 의미가 담겨 있다.

장충단의 초창기 모습. /사진제공=한국콘텐츠진흥원

위기감을 느낀 일제는 1900년대 후반 장충단에서의 제사를 전면 금지했다. 안중근 의사가 저격한 이토 히로부미의 추도행사를 장충단에서 열기도 했다. 한일병합이 일어난 1910년에는 장충단 비를 뽑아내고 아예 문을 걸어 잠갔다. 민족정신을 말살하기 위한 조치였다.

일제는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1920년대 후반 장충단에 일본의 국화(國花)인 벚꽃을 잔뜩 심고 위락시설인 장충단공원으로 만들었다. "공원으로 조성돼 잘 가꾸고 있지 않느냐"고 반문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장충단공원의 시초는 전혀 다른 목적이었던 셈이다.

1932년에는 이토 히로부미를 기리기 위해 박문사라는 사당까지 세웠다. 이 과정에서 경복궁의 석재와 목재를 뜯어와 건축재료로 썼고 경희궁 정문을 가져와 박문사 정문으로 삼는 만행을 저지르기도 했다.

해방 후 대한민국 정부는 장충단을 복원하기 위해 박문사를 철거하고 장충단 비를 다시 옮겨왔다. 사명대사, 이준·이한응 열사의 동상을 새로 세우기도 했다. 그러나 거기까지였다. 장충단은 항일 유적의 본 모습을 회복하지 못한 채, 그저 흔한 공원들 중 하나로 취급받고 있다.

◇ 장충단, 공원으로 모자라 족발동네로… 경찰이 나서 "바로 알리기 노력중"

항일유적인 장충단은 '족발동네'라는 이미지가 덧씌워지고, 족발집이 우후죽순 들어서면서 여름철 저녁이면 공원 내 음주·흡연·고성방가가 일상이 됐다.

뒤늦게 경찰이 장충단의 본모습을 되찾기 위해 나섰다. 관할인 서울 중부경찰서와 장충파출소는 올해 초부터 항일 역사가 담긴 장충단 일대의 환경을 정화하기 위해 '장충단 바로 알리기 운동'을 하고 있다.

평소 역사에 관심이 많았던 김성섭 중부경찰서장 주도로 공원 내 계도활동과 동상 물청소, 장충단 홍보 팸플릿 배포 등을 실시했다. 간간이 학생 등 시민들이 장충단공원에 견학 오면 역사강의도 선보인다.

장충단공원에서 '공원' 명칭을 떼고 초창기 장충단을 복원하겠다는 움직임도 나타나고 있다. 경찰 관계자는 "다른 항일 유적지에서 담배 피우거나 술 마시는 사람은 없을 텐데 장충단은 사람들이 잘 몰라 비례(非禮)를 범하는 것 같다"며 "견학 오는 사람들 중 학교 선생님들도 장충단 역사를 모르는 경우가 많다"고 안타까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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