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5년 4월8일 인민혁명당(이하 인혁당) 재건위원회 사건 관련자 중 8명의 사형이 확정됐다. 그로부터 18시간이 지난 4월9일 새벽 6시, 이들 8명은 모두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사건은 1964년 1차 인혁당 사건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964년 8월14일 김형욱 중앙정보부장은 기자회견을 열어 "북괴의 지령을 받은 지하조직 인혁당 일당 41명을 구속했다"고 발표했다.
하지만 사건 담당 검사들은 증거 불충분을 이유로 기소를 거부했다. 담당 검사 3명이 사표를 내는 갈등 끝에 1차 인혁당 사건은 6명이 징역 1년, 5명이 징역 1년에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는 것으로 마무리됐다.
1974년 4월3일 박정희 대통령이 긴급조치 4호를 선포하면서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이하 민청학련) 사건이 발생했다. 그해 4월25일 중앙정보부는 민청학련을 ‘불순 반정부세력’으로 규정하며 1024명을 영장 없이 체포했다.
1차 인혁당 사건 관련자들도 재수사 대상이었다. 비상보통군법회 검찰부는 5월27일 추가조사 내용을 발표하면서 민청학련의 배후 조종 세력으로 인혁당 재건위를 지목했다.
7월8일 군 검찰부는 2차 인혁당 사건이 된 인혁당 재건위 사건 관련자 23명을 국가보안법 위반, 내란 예비·음모 등의 혐의로 기소했다. 사흘 뒤 열린 비상보통군법회의 선고공판에서 재판부는 서도원·김용원·이수병·우홍선·송상진·여정남·하재완·도예종 등 8명에 대해 사형을 선고했다.
1975년 4월8일, 대법원 전원합의체의 상고 기각으로 23명에 대한 형이 확정됐다. 도예종 등 8명에 내려진 사형 선고는 변하지 않았다. 7명에게는 무기징역, 4명에게는 징역 20년, 남은 4명에게는 징역 15년의 형이 내려졌다.
국방부는 판결 18시간 만에 기습적으로 8명의 사형을 집행했다. 집행은 41년 전 오늘(1975년 4월9일) 서울구치소에서 이뤄졌다.
당시 집행장에 입회한 군목에 따르면 사형수들은 "억울하다. 정의가 우리의 희생을 밝혀줄 것" "조국통일이 속히 이뤄지기를 바란다" 등의 유언을 남겼다. 이마저도 중앙정보부는 내용을 조작해 인혁당 당수로 알려진 도예종씨가 사형 직전 "적화통일 만세"라고 외쳤다고 발표했다.
국제엠네스티는 다음날인 4월10일 사형 집행에 항의하는 성명을 내놓았다. 스위스에 본부를 두고 있는 국제법학자협회는 이 사건을 '사법살인'으로 규정하고 1975년 4월9일을 '사법사상 암흑의 날'로 선포했다.
2000년 10월 대통령 직속기구로 조직된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가 인혁당 사건에 대한 재조사에 착수했다. 위원회는 2002년 9월 인혁당 사건이 중앙정보부의 고문에 의해 과장·조작된 것이라고 밝혔다. 그해 12월 인혁당 재건위 사건의 피해자들과 유족들은 조사 결과를 근거로 서울중앙지법에 사건의 재심을 청구했다.
서울중앙지법은 2007년 1월23일 사형이 집행된 8명에 대해 무죄를 선고했다. '사법살인'을 당한지 32년 만에 일이었다. 이후 2008년에는 징역형을 받았던 나머지 사람들에 대해서도 무죄가 선고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