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행 동기는?"
"세상이 싫다. 빈부차이가 너무 크게 나 있고 돈 없는 사람은 큰 돈을 벌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지 않고 있다. 세상은 돈 없는 사람을 무시하고 있다."(1994년 9월 지존파 일당의 진술 내용)
1994년 4월, 학교 선후배와 교도소 동기 등이 모인 도박판에서 전년도 떠들썩했던 '고위층 대입 부정 사건'에 대한 이야기가 오갔다. 여기 모인 이들 모두 가난한 농촌에서 자라고 집안 형편상 중·고교를 중퇴했다. 그러니 또래 젊은이들은 고급 승용차를 타고 유흥가를 다닌다거나 대학 진학을 위해 돈을 쓴다는 것 자체가 소외감과 증오심을 불러일으켰다.
결국 이들은 부유층에 대한 증오를 행동으로 옮기자는 데에 뜻을 같이하기로 했다. '지존파'였다. 조직을 결성하고 경찰에 붙잡히기까지 약 6개월 동안 이들이 벌인 무차별적 엽기 살인극은 범행 수법이나 내용면에서 하나 하나 열거하기가 힘들 만큼 섬뜩하고 잔인했다.
이들은 지리산에서 물과 풀뿌리만 먹고 1주일 동안을 버티는 지옥 훈련을 했다. 망원경이 달린 사냥용 공기총과 전자봉, 전자 충격기, 심지어 다이너마이트까지 마련했다. 사낭용 공기총에는 항상 실탄을 넣어 수시로 사격연습을 하기도 했다. 마치 영화에서나 나올 법한 준비 과정이었다.
이들은 '돈 있고 빽 있는 자의 것을 빼앗고 그들을 죽인다'는 행동강령을 만들었다. 각 조직원당 10억원씩 모으겠다는 목표 아래 백화점 우수회원 명단을 입수해 범행대상으로 삼았다. 살인을 할 땐 반드시 모두가 가담하는 방식으로 조직의 단결력을 키웠다. 조직을 이탈한 동료는 죽음으로 응징했다.
하지만 부자들에 대한 증오는 무고한 시민들의 희생을 낳았다. 이들은 본격 범행에 앞서 담력을 키운다는 말도 안되는 명분을 내세워 20대 여성을 납치해 성폭행한 뒤 살해했다.
그 다음으론 돈을 모아 시골에 아지트를 마련했다. 겉으론 일반 집이지만 지하실에 창살감옥과 사체 소각장까지 갖춘 집이었다.
이후 엽기적 살인극이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경기도 양수리에 드라이브하러 온 일행이 첫 번째 범행 대상이었다. 가스총을 맞고 실신한 피해자들은 범인들의 아지트로 납치됐다.
조사 후 이들이 돈이 없음을 알게 된 범인들은 이들에게 강제로 소주와 맥주를 먹인 후 음주운전으로 죽은 것으로 조작하기로 했다. 납치된 이모씨(여성)는 살려만 주면 뭐든지 하겠다고 애원해 극적으로 살아남았다. 하지만 함께 붙잡힌 남성을 살해하는 과정에서 이씨를 강제로 가담하게 했다.
며칠 뒤 중소기업을 운영하던 소모씨 부부도 지존파에 납치됐다. 이들 부부는 공고 졸업 후 자수성가해서 빚을 내 공장을 인수한 중소기업인이었다. 이들은 1억원에 가까운 돈을 마련해 지존파에 주었지만 결국 잔인하게 살해됐다. 훗날 범인들은 "착한 사람들이었지만 자신들의 얼굴을 알고 있어 범행이 탄로날 것이 두려워 살해했다"고 고백했다.
어느 날 지존파 조직원 중 한명이 다이너마이트를 만지다 실수로 폭발이 일어났다. 조직원 중 한명이 상처를 입자 이씨는 "내가 간호를 하겠다"고 자진해 함께 읍내 병원으로 치료하러 갔다.
치료받는 동안 조직원은 자신의 핸드폰과 치료비에 쓰기 위해 가져간 돈 50만원을 이씨에게 맡겼다. 이씨는 감시가 허술해진 틈을 타 병원을 뛰쳐나왔고 우여곡절 끝에 서울로 올라와 경찰에 신고했다. 그녀가 납치된 지 8일만이었다.
이씨의 용감한 행동 덕분에 1994년 9월19일 지존파 살인 사건이 세상에 알려지게됐다. 추석 연휴 마지막 날이었다. 지존파 일당 6명은 모두 검거됐다. 하지만 검찰 조사 내내 이들은 범행을 후회하지 않았다.
범인 중 한 명은 "압구정동 야타족을 죽이지 못한 게 억울하다"고 태연히 말했다. 현장검증을 마친 뒤에도 "잘난 놈들은 모두 죽이려 했다. 죽여야 할 사람은 따로 있는데 엉뚱한 사람을 죽여 안타깝다"고 했다.
재판결과 지존파 일당 김기환(27) 강동은(23) 김현양(23) 강문섭(21) 문상록(24) 백병옥(21) 등은 사형을 선고받고 서울구치소에서 사형에 처해졌다. 이들의 우두머리는 사형 선고를 받은 후 "전두환, 노태우는 무죄인데 나는 왜 유죄야"라는 말을 하기도 했다.
당시 경찰의 대처 능력은 사회적으로 큰 문제가 됐다. 당시 이모씨의 사망은 음주운전으로 인한 단순 교통사고로, 소씨 부부 납치에 대해선 납치 원인을 추정하기 어렵다는 이유로 수사를 적극적으로 벌이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