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2월 경북 영천의 한 야산. 경북경찰청 반부패경제범죄2대 보이스피싱 전담수사팀 박영완 경위가 출동한 그 곳엔 불법 번호변작중계기와 전력 공급을 위한 태양광 패널이 설치돼 있었다. 주변엔 폐쇄회로(CC)TV도 없었고 택배 송장 조각과 담배꽁초 몇 개만 확보할 수 있었다.
택배 조각이 단서가 됐다. 박 경위는 택배 송장에 적힌 주소를 추적했다. 해당 주소지는 서울 도심의 한 주택이었다. 근처 CCTV를 확보해 태양광 패널을 택배로 수령한 사람을 특정했고 30대 중국인 A씨가 태양광 패널을 넘겨 받은 뒤 차에 싣고 떠나는 모습이 포착됐다. A씨 차량이 경북 영천의 야산 근처를 통과한 사실도 확인됐다. 경찰은 A씨를 전기통신사업법위반 혐의로 체포했다.
경찰 수사 과정에서 A씨가 관리했던 중계기를 통해 보이스피싱 범죄가 발생했고 피해자가 있음을 확인했다. A씨는 사기죄로 추가 기소됐다. 이 과정에서 중국으로 도주한 것으로 의심되는 A씨에게 중계기 관리를 지시한 윗선 등에 대한 수사자료도 확보했다.
일명 심박스(SIM box)라 불리는 불법 중계기는 해외 보이스피싱 조직과 가담자를 이어주는 핵심 연결 고리다. 중계기 단속 현장에선 번호 변조에 사용된 선불유심칩 수백개가 함께 발견된다.
해외 발신 전화 또는 문자메시지를 010번호로 둔갑시키는 불법 중계기 단속을 담당하는 박 경위와 경북청 보이스피싱 전담수사팀은 국내 체류 중인 보이스피싱 조직의 가장 '윗선'을 추적한다. 지난해만 대구·경북 지역에서 28건을 단속해 피의자 21명을 검거하고 이중 14명을 구속했다.
지난해 경북에선 전화금융사기(보이스피싱)가 전년 대비 40% 가까이 감소한 것으로 나타났다. 보이스피싱 피해액도 329억원에서 193억5000만원으로 40% 이상 줄었다.
이 과정에서 보이스피싱 등 범죄에 이용될 수 있는 중계기용 심박스 450대, 유심칩 998개를 압수했다. 심박스 1개당 최대 32개의 회선 연결이 가능하다. 경찰이 불법 중계기를 단속하는 순간 해당 번호를 사용한 추가 범죄는 불가능해진다.
박 경위와 보이스피싱 전담 수사팀은 중계기와 중계기 관리자에게서 확보한 관련 정보를 보이스피싱 조직 윗선을 추적하는 중요한 통로로 삼고 있다. 중계기 관리책은 중계기에 전력을 공급하고 작동하지 않는 유심은 교체한다. 이 과정에서 유심칩 공급책 등 다른 역할은 맡은 가담자와 조직 윗선 등과 연락을 주고받는다.
중계기 단속과정에서 윗선과 통화 내역, 불법 유심칩과 심박스에 사용한 단말기 가입자 고유식별번호(IMSI), 단말기 고유식별번호(IMEI) 등 다양한 단서를 확보할 수 있다.
지난해부터 경찰은 전국 경찰청과 협조해 불법 중계기 단속을 벌이고 있다. 전국 지방 경찰청에서 수집한 관련 자료와 증거는 통합관리한다. 윗선을 추적할 수 있는 단서와 그들이 행한 범죄의 증거들이 경찰청 한 켠에 쌓이고 있다.
경찰은 해외 총책에 대한 정보를 포함해 보이스피싱 조직 전반에 대해 자세히 알고 있는 윗선이 한국에 체류 중일 것으로 추정한다. 그를 검거할 경우 해외 총책을 검거할 수 있는 유의미한 단서를 추가 확보할 것으로 보인다.
박 경위는 "수사관들의 노력으로 보이스피싱 범죄도 곧 해외 체류 중인 총책에까지 상당부분 접근할 수 있는 수사기법이 나올 것으로 보고 있다"며 "해외 총책은 국내 총책에게 디테일한 내용을 지시한다. 통신 기술적인 내용과 범행의 방법, 설치 장소와 지급 수당 등에 대해 대화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경찰은 해외에서 복역한 보이스피싱 범인도 끝까지 추적해 한국 법정에 세워 벌을 받게 한다.
2015년 3월 중국 길림성 연길시에서 보이스피싱 콜센터를 운영한 한국인 이모씨 등 9명이 중국 공안과 한국 경찰의 협조에 검거됐다. 피해자 25명으로부터 2억5700만원을 가로챈 혐의를 받는 이들 중 총책 이모씨는 중국 법원에서 12년형을 선고받고 복역 중이다. 중국법원은 함께 검거된 콜센터 직원 B씨(30대 남성)에게 징역 7년 8개월 형을 선고했다.
지난해 출소한 B씨는 같은해 10월 한국으로 추방됐다. 박 경위는 해외 도피로 중단된 수사를 재개해 B씨를 송치했다. B씨는 대한민국 법정에서 2년형을 선고 받아 복역 중이다. 총책 이모씨 역시 2027년 중국에서 형기를 마치면 한국으로 추방돼 한국 법원에 다시 서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