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찰에 접수된 피해신고 987건, 피해 전세보증금 800억원대, 피의자는 50여명. 경찰이 확인한 피해 보증금만 430억원(533세대)."
'인천 건축왕'이라 불리는 남모씨(61) 일당의 전세사기는 현재까지 전국 최대 규모의 피해자가 발생한 전세사기 범죄로 꼽힌다. 지난 5월 2차 송치 이후에도 피해 신고가 이어지면서 전체 피해 규모는 더 커지는 중이다. 남씨 일당은 사회 초년생과 취약계층의 전재산인 전세보증금을 노렸다. 재기불능이라 여긴 피해자 4명은 극단선택을 했다.
인천경찰청 광역수사대 범죄수익추적수사팀(추적팀)은 남씨 일당을 수사하는 과정에서 사기범들이 부당하게 거둔 자산을 빼돌리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 급선무라고 판단했다. 사기 사건에서는 범죄 특성상 시간이 지날수록 범죄수익금 환수가 어려워진다. 전세사기는 특히 형법상 사기죄 혐의로는 기소 전 범죄 수익금 몰수·추징 보전 조처가 불가능한 범죄다. 그동안의 전세사기 사건에서도 범죄자들은 이런 점을 악용해 경찰에 붙잡힌 뒤에도 자산을 빼돌리기 일쑤였다.
지난 3월부터 남씨 일당 사건을 주시했던 추적팀은 사기 혐의에 범죄집단조직죄를 추가 적용하면 '기소 전 몰수·추징 보전 조처'가 가능하다는 점에 착안했다. 추적팀 박한수 경위와 신선화 경위가 나섰다. 지난 18일 인천경찰청에서 만난 박 경위와 신 경위는 "피해자의 피해를 어떻게든 줄이려면 범죄수익금이 수사 도중 밖으로 새나가지 않게 남씨 일당의 자산을 동결하는 게 가장 중요하다고 봤다"며 "남씨 일당의 자산 동결을 위해 우선 담당 수사팀(반부패경제범죄수사계)과 검찰부터 설득했다"고 말했다.
추적팀은 끝까지 피해자의 재산을 보전하기 위한 답을 찾으려 노력했다. 박 경위는 "범죄집단조직죄를 적용해야만 몰수추징보전 검토가 가능함을 적극적으로 표출했고 결국 수사팀과 검찰이 그의 의견에 손들어줬다"며 "2009년부터 부동산 업무를 했던 남씨 일당이 전세금을 돌려주지 못하는 걸 알면서도 조직적으로 범행한 점을 강조했다"고 말했다.
남씨 일당은 전세사기로 벌어들인 돈을 부동산, 자동차 등 곳곳에 분산해놨다. 추적팀 수사관 5명은 1만3000여장에 달하는 수사기록을 샅샅이 검토했다. 피해자들이 작성한 임대차계약서와 계좌기록, 진술 등을 대조해 전세사기 수익금의 흐름을 역추적했다.
남씨 일당의 행각이 10년 넘게 이어졌던 만큼 자금 추적 작업은 만만치 않았다. 남씨는 2009년부터 공인중개사와 중개보조원 등 다른 사람의 명의를 빌려 땅을 산 뒤 임차인들의 전세보증금을 이용해 자신이 운영하는 종합건설업체를 통해 아파트와 빌라를 짓고 이 건물에 또다른 임차인을 받는 방식으로 2700여채의 주택을 공범들의 명의로 보유했다. 남씨가 이렇게 가로챈 전세보증금은 430억원에 달했다. 공범들은 1인당 4억~5억원을 나눠가졌다.
신 경위는 "주범인 남씨를 포함한 공범 18명과 남씨의 가족, 사기 혐의로 조사받은 공범 등 58명의 재산내역을 전부 조사했다"며 "그 중 34명은 부동산 거래 내역이 아예 없어 실마리를 찾기가 쉽지 않았다"고 말했다.
몰수 보전을 신청해 법원에서 인용을 받으려면 범죄수익 특정을 위해 피의자 한명 한명의 수익금을 모두 규명해야 한다. 추적팀은 범죄수익금의 마지막 한 푼까지 찾아내 법원에 넘겼다. 결국 법원이 기소 전 몰수·추징을 인용하면서 추적팀은 남씨 일당의 자산을 동결할 수 있었다. 전세사기 사건 가운데 몰수·추징 보전이 인용된 전국 첫 사례다. 사기범들에 대한 법원 판결이 확정되면 피해자들이 민사소송 등을 통해 어느 정도 피해액을 되찾을 수 있게 됐다.
추적팀의 남씨 일당 범죄수익금 몰수·추징 사례 이후 전국에서 비슷한 사기 행각의 범죄수익금을 동결하는 사례가 이어졌다. 경찰이 이런 방식으로 올해 1~7월 몰수·추징한 전세사기 범죄수익금은 172억7000만원에 달한다. 경찰은 509억원 상당의 부동산에 대해서도 검찰에 범죄수익보전을 청구했다.
뜻깊은 성과지만 추적팀으로선 안타까운 마음이 더 크다고 한다. 박 경위는 "대부분의 전세사기 사건에서 범죄수익금은 부동산 이자 지급 등으로 증발해 몰수·추징하더라도 임차인들이 입은 피해를 회복하기에는 부족한 경우가 많다"며 "특히 사회 초년생들과 취약계층 등 힘없는 사람들을 상대로 한 이런 범죄는 다시는 일어나선 안 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