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1년 11월 30일. 중학생 이윤상 군(당시 13세)이 실종된 지 1년 17일 만에 유괴범이 붙잡혔다.
검거 1년여 전 1980년 11월 13일, 오후 4시쯤 중학교 1학년이었던 이윤상 군은 누나 참고서를 대신 사주기 위해 서점에 들렀다. 이곳은 윤상 군의 마지막 목격지가 됐다.
원래 윤상 군은 우표 구입을 위해 우체국에 갔다가 이후 버스 정류장에서 학교 체육 선생님을 만날 예정이었으나 나타나지 않았다. 선생님은 윤상 군이 약속 시간에 나오지 않자 대학원 수업을 위해 자리를 떴다고 했다.
그날 저녁 8시 윤상 군 집에는 유괴범의 협박 전화가 걸려 왔다. 첫 협박 전화 속 목소리는 남자였다. 범인은 "윤상이는 우리가 데리고 있다. 일본으로 밀항할 자금이 필요하다. 4000만원을 마련하라. 경찰에 신고하면 아들을 죽이겠다"고 협박했다.
윤상 군의 아버지는 당시 고급 아파트 두 채 값에 달하는 어마어마한 몸값 요구에 '당장은 그런 거액을 만들 수 없다. 2000만원은 어떻게든 마련하겠다'며 사정했다. 이날 자정까지만 4차례 협박 전화가 걸려 왔다. 첫 전화 이후로는 모두 여자 목소리였다.
윤상 군 가족들은 '비공개 수사'를 부탁하며 경찰에 신고했다. 서울마포경찰서는 윤상 군 집 전화에 녹음장치를 부착하고, 형사를 잠복시키는 등 수사에 돌입했다.
이후로도 범인은 여러 차례 협박 전화를 걸어왔다. 실종 3일째인 16일에 저녁 걸려 온 전화에서 범인은 윤상 군의 목소리를 들려주기도 했다. 윤상 군은 "이분이 시키는 대로 하세요. 아니면 나는 죽어요"라고 말해 가족들을 애타게 했다. 그러나 너무 짧은 통화 시간에 전화 추적은 불가능했고, 전화번호는 모두 공중전화였다.
범인은 17일 수원 우체국에서 윤상 군 부모에게 보낸 편지로 "20일 저녁 7시까지 ○○제과점으로 돈을 들고나오라"라고 요구했고, 윤상 군 누나가 돈 가방을 들고 가자 "마음이 바뀌었다. 남산 야외 음악당으로 오라"고 요구했다.
미리 경찰이 대기 중이었던 위치가 아닌 다른 곳으로 오라는 요구에 윤상 군 아버지는 "야외 음악당 위치를 잘 모르겠다. 시간을 달라"고 했다. 그러자 범인은 전화를 끊어버렸고, 끝내 나타나지 않았다.
이후 "윤상이가 책을 읽고 싶어 하니 마포우체국 공중전화 부스에 책을 올려놓아라"라는 전화가 오거나 "1981년 1월 15일 오후 4시 반에서 5시 사이에 검은 승용차에 윤상이를 태우고 마포우체국 앞을 통과할 테니 얼굴만 보라"는 내용의 편지가 오기도 했으나 이는 모두 거짓말이었다.
유괴범들은 2월 2일 보낸 편지에서 "윤상이가 교통사고를 당했으며 아직 살아있다"고 전하기도 했으나 4월 6일을 마지막으로 연락이 끊겼다.
범인은 1980년 11월 13일부터 1981년 4월 10일까지 모두 62차례 협박 전화와 6차례 협박 편지를 보냈다. 실종 당일 걸려 온 첫 협박 전화만 남자 목소리였으며, 나머지는 모두 여자 목소리였다. 1, 2, 5번째 협박 편지는 여성 필체였고 3, 4번째 편지는 남자 필체로 분석됐다.
윤상 군이 실종된 지 4개월이 지나자 대통령까지 나서 사건에 관심을 가졌다. 비공개로 이어오던 수사는 공개로 전환됐고, 전담 요원만 322명, 동원된 경찰은 무려 2만 3000여 명에 달했다. 단일 사건으로 역대 최대 규모였다.
언론 보도도 이어지면서 윤상 군이 다니던 학교 동창들과 선생님, 온 국민이 한마음으로 윤상 군의 무사 귀환을 빌었다. 그러나 윤상 군은 돌아오지 못했다.
사건으로부터 1년이 지난 1981년 11월 30일 윤상 군을 유괴 후 살해한 범인이 체포됐다. 범인은 다름 아닌 윤상 군이 실종 당시 만나기로 한 체육 교사 주영형이었다.
주영형은 사건 초기 윤상 군 부모에게 "제가 괜히 윤상이와 면담을 하겠다고 해서 윤상이가 유괴된 것 같아 송구하다"며 엎드려 사죄하기도 했던 인물이었다. 서울대 출신 엘리트 교사였던 주영형은 학생들에게 늘 친절해 인기가 많았던데다 결혼해 아이 둘을 둔 아빠였기에 의심을 사지 않았다.
심지어 그는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체육 교사로서 신경을 많이 썼다. 꿈에 같이 축구하는 장면도 보이고 했다. 범인들이 무슨 일이 있더라도 우선 아이만 보내준다면 고맙겠다"고 말하기도 했다.
그러나 사건이 미궁에 빠지면서 경찰 재조사에 나섰고, 그 과정에서 주영형의 알리바이에 2시간 공백이 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윤상 군 실종 당시 대학원 수업에 참석했다던 주영형은 출석 체크만 하고 금방 나갔다는 진술이 나온 것이다.
추궁 끝에 주영형은 과거 재직했던 여자중학교에서 만난 미성년 제자와 성관계를 맺기 위해 대학원 수업에서 빠져나갔다고 자백했다. 그는 여고생 2명과 불륜 관계를 맺고 있었고, 이들은 주영형의 범행을 도운 것으로 드러났다.
주영형은 윤상군 학교로 오기 전 여자중학교 재직 시절 성폭행 문제를 일으킨 인물이었다. 경찰은 주영형이 여관에 데려간 여학생만 무려 22명에 달한다는 사실도 밝혀냈다.
경찰은 일단 주영형을 미성년자 성폭행 혐의로 연행, 압박을 가한 끝에 1981년 11월 29일 "도박 빚 1800만원을 갚기 위해 윤상이를 유괴했다"는 자백을 받아냈다. 경찰은 주영형의 진술에 따라 윤상 군 매장 현장을 뒤진 끝에 시신을 찾아냈다.
주영형은 가정환경 조사서에 '가정 경제 형편 상(上)'으로 나타난 이윤상 군을 범행 대상으로 삼았다.
주영형은 윤상 군을 택시에 태워 자기 집으로 데려간 뒤 손발을 묶고, 테이프로 입을 봉한 뒤 이불을 뒤집어씌워 눕혀놓고는 그대로 방치해 숨지게 했다.
주영형은 유괴 이틀 후인 11월 15일 아침 출근했다 오후 2시쯤 돌아와 보니 죽어있었다고 진술했다. 이에 따르면 윤상 군은 11월 15일에 질식사한 것으로 추정된다. 16일 협박 전화에서 들려준 윤상 군의 목소리는 미리 목소리를 녹음해뒀다가 들려준 것이었다.
주영형은 11월 30일 윤상 군 시신을 넣은 여행용 가방을 가정집 옥상용 물탱크로 흔히 쓰던 PVC 통에 집어넣었고, 경기도 가평 북한강 변에 암매장했다.
주영형은 1982년 11월 23일 대법원에서 사형 선고를 받았고, 판결 7개월 16일 만인 1983년 7월 9일 교수형에 처했다.
주영형의 불륜 상대이자 제자였던 공범 여고생들은 단기 3년 장기 5년, 징역 2년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