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숨을 걸고 현해탄을 건너 일본에 비밀업무를 수행하기 위해 갔던 66명이 죽거나 허탈하게 돌아왔다. 공작은 미수에 그쳤고 약속했던 보상도 없었다.
1959년 12월4일 대한민국 정부가 파견한 공작원 66명이 일본 니가타현에서 테러를 기도한 사건, 니카타 일본 적십자 센터 폭파 미수 사건이다. 이 사건은 '재일교포 북송저지 공작 사건'으로도 불린다.
일본의 제2차 세계대전 패배로 장기간 식민 지배에서 해방이 된 한반도에는 각기 다른 정부가 들어섰다. 남쪽에 들어선 대한민국 정부(남한)와 북쪽을 차지한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북한)이 양립했다.
북한은 통일을 명분으로 남침을 강행했다. 6.25 한국 전쟁이다. 한국 전쟁 휴전 회담이 개시된 후인 1952년 1월, 대한민국 대통령 이승만은 '평화선'을 설정, 대한민국 인접 해양에 대한 주권을 공표했다. 독도와 동해 바다 등에 들어온 일본 선박과 선원들도 억류했다.
1950년대 재일 한국인 사회는 공산당 계열의 조총련(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이 대세를 이루고 있었다. 대한민국과 일본은 미수교 상태였던 데다, 앞선 억류 등으로 일본 내에서 지지를 받지 못했다. 북한의 재일동포 지원도 한국 정부보다 많았다.
이에 재일 조선인을 일본에서 내보내고 싶었던 일본과 국제 사회에서 대한민국보다 체제의 우월성을 인정받고 싶었던 북한의 이해가 자연스레 맞물렸다.
두 나라 역시 정식 수교를 맺은 상태는 아니었다. 적십자 단체를 통해 물밑으로 재일교포 북송 작업이 시작됐다.
한국 정부는 이 사실을 알게된 즉시 한일 회담을 취소하고 일본을 강도 높게 비난했다. 이에 그치지 않고 한국 정부는 재일교포 일본 북송을 막기 위해 공작원 66명을 파견하기로 결정했다.
일본에 돌아가지 않고 한국에 체류하던 재일 학도의용군 중 42명, 한국 본토인 24명 등 총 66명으로 결성된 북한 송환 저지 공작원들은 고도의 훈련을 받았다. 이중 한국 본토인 24명은 경찰 시험에 합격한 사람들로 '나라를 위한 특수한 일을 하게 될 것'이라는 사전 통보를 받았다. 공작원은 3개 소대로 편성돼 2개월간 암호송수신, 폭발물 설치, 요인 납치 등 공작원 교육을 받았다.
1959년 12월, 공작원 중 일부 선발대가 경북 경주시 감포항에서 선원으로 위장한 채 일본 규슈 북부에 상륙했다. 이들은 니카타항과 인접한 도야마에 아지트를 설치했다.
부여받은 임무는 크게 4가지였다. △일본 적십자사의 파괴△니가타항으로 향하는 철로 파괴△재일조선인 귀환 사업을 담당했던 일본인 암살△일본 정재계에 침투 등이었다.
그러나 계획은 허망하게 무너졌다. 니가타현 시바타시의 한 술집에서 공작원 2명이 술을 마시면서 공작에 대한 대화를 스스럼없이 나눴다가 체포된 것이다. 일본 경찰은 이들의 짐에서 다이너마이트 등 폭발물도 발견했다. 니가타 역에서는 1리터 휘발유캔 4개가 숨겨져 있던 위스키 상자도 추가 발견됐다.
이후 파견된 공작원들도 줄줄이 일본 경찰에 적발됐다. 12월12일 거제도에서 출발한 명성호에 타고 있던 공작원 12명은 폭풍에 배가 침몰하면서 숨지기도 했다. 이렇게 공작 시도는 실패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당시 일본과 미수교 상태긴 했지만, 미국의 동맹국 일본을 함부로 대할 수 없었다. 공작원들에 대해 모르쇠로 일관했다.
나가사키 형무소에 6개월 남짓 수감돼 있던 공작원들은 1961년 한국으로 강제 송환됐다. 그러나 반기는 사람은 없었다. 또 일본의 6개월 조사 과정에서 고문 등으로 몸이 만신창이가 된 상태였다. 보상을 요구했지만, 이듬해 3.15 부정선거로 4.19 혁명이 일어나면서 이승만 정권은 실각했고, 당시 약속했던 '경찰 임용과 생계 지원' 보상도 없던 일이 됐다.
이들은 2009년에서야 명예가 회복됐다. 정부가 사실을 인정한 것이다. 정부는 공작활동 중 사망한 공작원을 국립대전현충원에 안장, 정부의 지시였음을 사실상 인정했다.
이후 2011년, '재일교포 북송저지 특수임무수행자 보상에 관한 법률'이 제정됐다. 숨진 북송 저지 공작대원들과 후손들에겐 보상금과 위로금 등 총 104억여원이 지급됐다. 반세기 만에 보상을 받은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