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4월 16일. 청해진해운의 여객선 세월호가 전라남도 진도군 관매도 부근 해상에서 침몰해 승객 중 304명이 사망했다. 이 사고는 '세월호 참사'로 사고의 충격이 가시지 않은 채 11번째 봄을 맞게 됐다.
세월호는 2014년 4월 15일 오후 9시에 인천항에서 출발했다. 제주도로 수학여행을 떠나던 경기도 안산 단원고등학교 학생 325명과 교사 14명, 인솔자 1명, 일반 탑승객 70명, 화물기사 33명 등 476명이 탑승하고 있었다.
4월 16일 오전 8시30분쯤 맹골도와 서거차도 사이에서 물살이 빠른 맹골수도로 진입했고, 맹골수도를 빠져나간 후 8시46분쯤 병풍도 해상에 진입했다. 8시48분쯤 10도 변침해야 하는 지점에서 첫 번째 조타에서는 평소와 같았지만 두 번째 조타에서 우선회가 계속됐다. 알 수 없는 이유로 기울어졌고 J자를 그리며 왔던 길 방향으로 표류했다.
세월호는 8시49분쯤 45도쯤 기울어졌고 갑판 외판의 루버 통풍구를 통해 바닷물이 들어오기 시작한 것으로 추정된다. 9시50분쯤 선수와 객실 중앙부까지 침수가 시작됐고 세월호의 기울기는 62.8도가됐다. 10시30분쯤 세월호는 뱃머리만 남기고 물에 잠겼다.
오전 8시52분쯤 한 학생이 전남소방본부 119상황실에 신고전화를 했다. 이 학생은 "살려주세요"라고 말하고 배가 침몰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신고 전화가 접수된 때부터 세월호 선내에는 "가만히 대기하고 있으라"는 안내 방송이 계속 나왔다. 선장과 선원들은 승객들에 대한 조치를 취하지 않고 대기 방송만 내보내다가 9시45분쯤 가장 먼저 탈출했다.
9시44분쯤부터 구조가 시작됐다. 해경은 헬기와 123정을 동원했으나 10시11분쯤에는 세월호에서 물러났다. 오히려 여러 민간 어선들이 구조작업에 동참해 생존자의 절반 이상을 구했다.
탑승자 476명 중 구조자는 단원고 학생 75명, 교사 3명, 일반인 94명으로 총 172명이다. 당일 10시30분 이후 생존자는 없었다. 304명이 사망하면서 대형 참사로 기록됐다.
세월호 참사는 이후 대한민국 사회에 막대한 영향을 끼쳤다. 대형 재난의 책임 주체에 대한 논란이 커졌다.
당시 박근혜 전 대통령은 사고 13일 만인 4월 29일 국무회의에서 사과를 했다. 박 전 대통령은 사고 당일 '세월호 7시간' 동안 행적이 묘연했던 것으로 드러나 비판을 받기도 했다.
해경을 향한 책임론도 일었다. 해경 123정이 현장에 도착한 이후 25분간 '골든타임'이 있었음에도 구조 작업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는 이유다. 다만 구조 책임과 관련해 유죄가 선고된 것은 김경일 당시 목포해양경찰서 소속 123정장이 징역 3년을 확정받은 것이 유일하다. 이외에 재판에 넘겨졌던 해경 지휘부 9명은 2023년 대법원에서 무죄가 확정됐다.
탑승객을 구조하지 않고 탈출한 이준석 세월호 선장은 2015년 일찍이 대법원에서 무기징역을 확정받았다. 화물을 과다하게 실어 안전 관리를 소홀히한 김한식 청해진해운 대표는 대법원에서 징역 7년이 확정됐다.
목포지방해양안전심판원은 사고 발생 11주기를 앞둔 지난 14일 세월호 참사가 '안전 관리 부실'로 인해 발생했다고 밝혔다. 해양사고 관련자들의 불복하면서 사건은 2심격인 중앙해심으로 넘어갔다.
심판부는 세월호가 과도한 양의 화물을 안전하지 못한 상태로 싣고 항해하던 중 변침 과정에서 조타기 이상 동작으로 과도하게 선회해 경사가 발생했고 화물이 한쪽으로 쏠리며 외판 개구부로 해수가 유입돼 복원성을 상실해 발생한 것이라고 결론 내렸다.
심판부는 "선박 운항 전반에 걸쳐 관여하는 선사, 선원, 검사·감독기관, 위탁업체 등의 각 주체가 '이 정도는 괜찮겠지'하는 안일함으로 부주의와 규정 위반을 장기간 반복해 시행함에 따라 잘못된 관행들이 누적되고 결합해 발생한 총체적 안전관리 부실이 근본적인 원인"이라고 설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