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ESG(환경·사회·지배구조) 경영의 초점이 환경이었다면 내년에는 사회와 지배구조가 부각될 것으로 예상된다. 재계와 금융투자업계를 흔들 법들이 올해 말과 내년 초에 시행되기 때문이다. 공정거래법 전부개정안과 중대재해처벌법이다.
20일 공정거래법 전부개정안은 오는 30일부터, 중대재해처벌법은 내년 1월 27일부터 시행된다. 공정거래법은 그룹 내 일감 몰아주기 등을 통해 대주주가 사익을 편취하는 길을 막기 위함이다. 이를 피하기 위해 그룹사들은 투명한 지배구조를 강화할 필요가 있다. 중대재해처벌법은 사업장에서 일어나는 인명 피해에 대해 경영자의 책임을 강하게 묻겠다는 것이다. 산업재해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높아지고 있지만 인명피해가 좀처럼 급격히 줄지 않는 데 대한 극약처방이 내려졌다.
ESG 투자를 급속하게 늘려가던 금융투자업계에도 비상이 걸렸다. 공정거래법은 상장사들의 지배구조 체제에, 중대재해처벌법은 부동산·선박 펀드 등에 영향을 줄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공정거래법 전부개정안에서는 사익 편취 규제 대상이 대폭 확대됐다. 총수 일가의 지분 보유 기준을 현행 상장사 30%, 비상장사 20%에서 상장사·비상장사 20%으로 일원화했다. 또 총수 일가가 지분을 20% 이상 보유 하고 있는 회사의 자회사(50%이상 초과 보유)도 대상에 포함됐다.
개정안이 내부거래 자체를 금지하는 것은 아니지만 규제 대상이 확대되는 만큼 예방책을 강구할 필요가 있다. 64개 공시집단 기준 사익편취 규제 대상 회사는 기존 265개에서 600여개로 폭증할 전망이다. 공정위는 또 과징금 부과 상한을 최대 2배로 상향했다. 담합 과징금은 관련 매출액의 10%에서 20%로, 시장지배력 남용행위는 3%에서 6%로, 불공정거래행위는 2%에서 4%로 오른다.
통상적으로 내부거래 비중이 높은 계열사는 SI(시스템통합), FM(시설관리), 물류, 광고 등의 사업을 영위하는 회사들이다. 대기업들은 개정 특수관계인 지분 매각, 합병 등을 통해 올해 선제 대응에 나섰다. CJ올리브네트웍스와 CJ CGV는 합병에 나섰고, LG그룹은 계열사 S&I코퍼레이션이 FM 부문과, 자회사 S&I 건설 지분을 매각했다.
중대재해처벌법은 사업장에서 '안전 및 보건 확보 의무'를 위반해 중대재해가 발생하면 사업주와 경영책임자가 책임지게 했다. 근로자 사망 시 경영책임자는 1년 이상 징역에 처해질 수 있다. 건설, 조선 등 제조업체들의 ESG 리스크가 높아졌다.
핵심은 대표이사 외에도 실질적으로 사업을 총괄하는 '오너'에게도 형사책임을 부과하겠다는 것이다. 또 제3자에게 도급, 용역, 위탁한 경우에도 사업주나 법인이 책임을 지게 했다. 중대재해처벌법을 피하기 위해서는 이사회 내에 안전보건위원회를 설치하는 등 사고예방에 힘써야 한다.
국내 산업재해 사고 사망자가 유의미한 감소세를 보이지 않자 사업주에 대한 처벌을 강화한 것이다. 고용노동부에 따르면 국내 산업재해 사고 사망자는 2015년 955명에서 2020년 882명으로 최근 5년간 73명 감소하는 데 그쳤다. 올해 1∼11월 산업재해 사망자는 790명으로 지난해 같은 기간(815명)보다는 25명 줄었다. 중대재해처벌법 시행을 앞두고 산업 현장에서 안전을 최우선으로 하는 분위기가 확산되고 있는 덕분으로 풀이된다.
금융투자업계에서는 ESG 펀드를 운용하는 기관 투자자로써 뿐만 아니라 자산운용사 자신이 중대재해처벌법 대상이 될 수 있다는 위기감에 대응책 마련에 나서고 있다.
주식시장에서 이번 공정거래법 전부개정안의 최대 관심사는 현대차 그룹이다. 현대차그룹의 사익편취 규제 대상 기업은 현대머티리얼, 현대커머셜, 서림개발, 서울피엠씨에 더해 현대글로비스 등이 새롭게 추가된다. 현대글로비스는 현대차그룹의 물류를 담당해 지난해 매출(16조 5198억원) 중 71%(11조8694억원)가 계열사 간 내부 거래에서 발생했다.
현대글로비스는 정의선 현대자동차 회장이 지분 23.29%를 보유하고 있다. 정몽구 명예회장의 지분(6.71%)까지 포함하면 29.9%로, 기존 기준(30%)은 아슬아슬하게 피했지만 낮아진 개정안을 피하기 위해서는 지분을 10% 가량 줄여야 한다.
최남곤 유안타증권 연구원은 "대주주가 직접 주식시장에 블록딜형태로 지분을 매각할 가능성은 낮다"며 "사모펀드와 주가수익스왑(PRS)을 체결하는 방안을 고려할 수 있다"고 말했다.
2015년에도 강화된 공정거래법에 대응하기 위해 당시 최대주주 일가가 현대글로비스 지분 13.39%를 매각하려 했지만 실패하면서 5거래일 동안 주가가 22% 하락한 전례가 있기 때문이다. 반면 PRS는 주가에 따라 수익이 정산돼 장기 주가 관리를 기대할 수 있다. SK디스커버리는 SK건설 지분 28.25%를, 두산중공업은 두산밥캣 지분 10%를 PRS 방식으로 처분한 바 있다.
ESG 펀드를 운용하는 A 자산운용사 매니저는 "두가지 법 개정으로 당장 포트폴리오를 조정하지는 않았지만 기업들에게 항후 계획에 대해 질의서를 보낸 바 있다"며 "개선이 되지 않는다면 비중 조절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
부동산·선박펀드를 운용하는 자산운용사들은 자체적으로 운용 규정을 강화하거나 금융투자협회를 통해 중대재해처벌법에 공동 대응하고 있다. 중대재해처벌법의 처벌 대상은 '사업 운영에 대한 실질적인 권한과 책임이 부여된 사람'으로 자산운용사 역시 해당되기 때문이다.
금투협은 지난 10월부터 자산운용사 33개곳과 함께 공동 법률 대응 매뉴얼을 제작하고 있다. 금투협 관계자는 "중대재해처벌법을 준수하기 위해 자산운용사의 내부 규정 또는 사업 위탁 계약시 어떠한 조항이 필요한지 법적 검토를 하는 것"이라며 "내년 법 시행 전까지 매뉴얼이 완성될 것"이라고 말했다.
ESG 펀드를 운용하고 있는 B 선박펀드 자산운용사는 "선박펀드는 전세계를 누비는 만큼 국제 해양법 등 엄격한 법 규정을 이미 지키고 있지만 국내에도 처벌 규정이 마련되면서 안전관리 원칙에 대한 매뉴얼을 추가하는 등 내부 규정 강화하고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