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은 우편함에서 튀어나올 조단위 자금[기자수첩]

김지훈 기자
2025.04.28 04:41
영국령 케이맨제도에 위치한 우글랜드하우스. /사진=구글맵 캡처

카리브해 외딴 섬에 최소 11조9000억원 짜리 우편함이 있다. MBK파트너스 6호 펀드가 SEC(미국 증권거래위원회)에 제출한 신고서에 나온 법적 소재지가 영국령 케이맨제도에 있는 '우글랜드하우스 사서함 309번'이다. 이 펀드는 지난해 12월 50억달러(한화 7조2000억원)를 모았고 다음달 70억달러 목표 달성을 위해 막바지 모집에 나섰다.

지난해 4조7000억원 규모로 조성된 한앤컴퍼니 4호 펀드도 사서함 끝자리까지 똑같은 주소로 SEC에 신고했다. 두 펀드가 비좁은 우편함을 공유하는 이유는 이곳이 현지 페이퍼컴퍼니 등록을 대행하는 로펌 메이플스그룹이 쓰는 사서함 번호이기 때문이다.

우글랜드하우스는 버락 오바마 전 대통령이 2008년 대선 유세과정에서 "세계에서 가장 큰 건물 또는 세계 최대의 세금 사기"라고 비판했던 5층 높이 건물이다. 1만2000개에 달하는 미국 기업이 우글랜드하우스를 법적 주소라고 등록하다보니 탈세 온상이라는 의혹을 제기한 것이다. 케이맨제도는 조세회피처(tax haven) 가운데서도 법인세나 소득세 등 세금이 없는 '세금 낙원(tax paradise)'이다.

대형 PEF 입장에선 조세회피처를 거점으로 내거는 것이 다국적 자금 유치에 유리하다. 세금 문제를 단순화하고 이중 과세를 방지할 수 있어서다.

그러나 MBK·한앤컴퍼니 모두 주요 의사결정자들이 외국 국적자라는 이중 정체성이 규제 딜레마를 초래한다. 선진 경영 노하우 도입 등 기대 못잖게 기술 유출, 조세 기반 약화 등 부작용 우려가 뒤따른다. 특히 SK실트론과 같은 국가핵심기술 보유기업 매각이 고민을 안긴다.

미국은 외국인에 의해 통제되는 모든 실체(any entity)를 외국인으로 규정한다. 반면 한국은 외국계 자본이 통제해도 국내 법인을 세운 PEF는 외국인으로 간주하지 않는다. 국내 특수목적법인 설립 등을 통한 우회 투자와 기술 유출에 대한 법적 규제 근거가 미흡할 수밖에 없다.

정부는 국경과 법적 층위가 얽히고 설킨 M&A(인수합병) 게임에서 자본 유치와 산업 보호의 균형점을 찾을 지혜를 모아야 한다. 외국계 펀드는 민감한 M&A에서 납득할 만한 기술 보호 약속을 제시해야 한다. 토종 펀드의 참전도 예상되는 SK실트론 인수전이 자본시장 성숙도를 높이는 계기가 돼야 한다.

<저작권자 © ‘돈이 보이는 리얼타임 뉴스’ 머니투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AI학습 이용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