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속 장(腸)은 인간의 영양 결핍 상태를 감지해 뇌에 신호를 보낸다. 인간은 뇌가 보내는 신호를 받고 무엇을 먹을지 결정한다. 이같은 장과 뇌 사이 행동 조절 메커니즘이 국내 연구팀에 의해 처음으로 확인됐다.
과학기술정보통신부는 서성배 IBS(기초과학연구원) 마이크로바이옴-체-뇌 생리학 연구단 단장이 이끄는 연구팀이 서울대, 이화여대 공동연구진과 함께 '장-뇌 축'(gut-brain axis) 작동 원리를 규명했다고 22일 밝혔다. 연구 성과는 국제 학술지 '사이언스'에 이날 게재됐다.
장은 단순한 소화 기관이 아니다. 몸속 영양 상태와 음식 성분, 미생물, 병원균 등 다양한 정보를 감지하는 동시에 장 분비 호르몬을 통해 혈당, 식욕, 면역 등 전신 대사를 조절한다. 장이 '제2의 뇌'로 불리는 이유다.
하지만 장에서 만들어진 신호가 어떤 신경·호르몬 경로를 통해 뇌에 전달되고, '무엇을 먹을지'라는 행동 선택으로 이어지는지에 대한 구체적인 과정은 정확히 밝혀지지 않았다.
연구팀은 앞서 2021년, 단백질 결핍 상태의 초파리를 분석해 장에서 펩타이드 호르몬 'CNMa'가 분비될 때 단백질 음식을 선호하게 된다는 사실을 밝힌 바 있다.
이번 연구에서는 이어 CNMa 호르몬 신호가 뇌로 전달되는 경로와 영양소 선택 원리까지 확인했다.
연구팀은 영양 결핍에 대응하는 장-뇌 축이 한 가지 경로가 아닌 '빠른 신경망'과 '느린 호르몬 작용'을 동시에 작동하는 시스템임을 밝혔다. 장 상피세포가 단백질 부족 신호를 감지하면 먼저 장-뇌 신경 경로를 통해 빠르게 뇌에 신호를 보낸다. 이 신호를 받은 뇌는 우리 몸이 즉각 필수 아미노산을 섭취하도록 유도한다. 뒤이어 분비된 CNMa 호르몬은 순환계를 타고 느리게 뇌에 도달해 단백질 선호 행동이 계속해서 유지되도록 돕는다.
장에서 유래한 CNMa 신호가 탄수화물(포도당) 섭취를 촉진하는 뉴런 'DH44'의 활성을 억제한다는 사실도 이번 연구에서 처음으로 확인됐다. 몸의 영양 균형을 맞추기 위해 장과 뇌가 스스로 식단을 재조정하는 셈이다. 또 동물은 부족한 영양소를 채우기 위해 전체 식사량을 늘리는 게 아니라 특정 영양소를 선택하고 다른 영양소는 배제하는 '선택적 섭식 행동'을 한다고 볼 수 있다.
연구팀은 장-뇌 축 시스템이 초파리를 넘어 포유류(생쥐)에서도 동일하게 작동함을 확인했다. 단백질 결핍 반응의 핵심 호르몬으로 알려진 간 유래 호르몬 'FGF21'이 없는 상태에서도 동일한 행동 반응이 유지됐다. 이는 인간의 식이 장애 치료에 CNMs 호르몬 메커니즘을 활용할 수 있다는 의미다.
서 단장은 "대부분의 비만·식욕 조절 약물은 장 호르몬 신호를 활용하지만 자연 분비 장 호르몬이 뇌와 행동에 미치는 영향과 경로는 그간 충분히 연구되지 못한 주제"라며 "이번 연구는 장-뇌의 영양소 선택 원리를 밝혀 향후 비만, 대사 질환, 식이 행동 장애 치료 연구에 중요한 기반이 될 것"이라고 했다.
김성수 연구개발정책실장은 "생명 현상의 규명과 같은 기초 연구 성과는 국가 과학기술 경쟁력의 단단한 뿌리"라며 "연구자가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고 독창적인 연구에 마음껏 도전할 수 있도록 안정적인 연구 환경을 구축하겠다"고 했다.
이번 연구는 과기정통부 개인기초연구사업, IBS 기초과학연구단사업, 삼성미래기술육성사업의 지원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