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 사태가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시계제로' 국면이 됐다. 유로존(유로화 사용 19개국)은 그리스를 배제한 채 구제금융 중단을 선언하고 그리스의 파국에 대비한 '플랜B'로 눈을 돌렸다. 그리스는 채권단의 협상안을 국민투표에 부치기로 하면서 혼란을 부채질했다. 그리스 은행권에서는 뱅크런(대규모 예금 인출 사태)이 가속화하면서 금융시스템을 벼랑 끝으로 내몰았다.
◇유로존, 그리스 파국 대비 '플랜B' 논의
유로존 재무장관 협의체인 유로그룹은 27일(현지시간) 벨기에 브뤼셀에서 열린 긴급회의에서 그리스의 구제금융 연장 요청을 거부했다. 이로써 그리스에 대한 기존 구제금융 프로그램은 오는 30일 지원금 72억유로를 집행하지 않은 채 종료된다. 그리스는 같은 날 국제통화기금(IMF)에 15억5000만유로를 갚아야 하는데 사실상 상환이 불가능하게 됐다.
크리스틴 라가르드 IMF 총재는 이날 영국 BBC와 한 회견에서 그리스가 오는 30일 채무를 상환하지 않으면 더 이상의 지원은 없다고 못 박았다.
유럽연합(EU) 외교가에선 이날 유로그룹이 발표한 성명에 주목했다. 성명에는 그리스를 제외한 유로그룹의 모든 멤버가 이번 결정을 지지했다고 돼 있다. EU에서는 만장일치가 불문율이라는 점에서 매우 이례적이라는 평가다. 그리스에 대한 유로존의 불만과 불신을 방증한다는 지적이다.
실제로 유로존은 이제 그리스와 추가 협상을 벌이기보다 그리스가 파국을 맞을 가능성이 더 크다며 '플랜B'를 준비하는 분위기다. 타스통신에 따르면 알렉산더 스터브 핀란드 재무장관은 이날 "그리스가 국민투표 방침을 발표하면서 유로존 출구에 더 가까워졌다"며 "유로그룹의 다음 회의는 그리스에 대한 플랜B에 초점이 맞춰질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그는 "이제 우리에겐 플랜B가 플랜A"라고 강조했다.
플랜B는 유로존 국가들이 그리스의 디폴트(채무불이행)나 유로존 이탈(그렉시트) 가능성이 커졌다는 판단 아래 파장을 최소화하기 위한 전략을 말한다. 유로존은 특히 그리스 은행권에서 한창인 뱅크런과 이에 따른 그리스 정부의 자본통제 가능성에 촉각을 세우고 있다.
◇치프라스 '극약처방' 국민투표 실효성 논란
알렉시스 치프라스 그리스 총리는 이날 국민투표 제안으로 유로그룹 회의에 찬물을 끼얹었다. 그는 회의 직전 회견에서 국제 채권단이 구제금융 지원 조건으로 제시한 경제개혁안을 '협박'으로 규정하고 "그리스 국민만이 이 최후통첩에 대해 어떻게 응답할지 결정할 수 있는 권리를 가지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리스 의회는 28일 새벽 국민투표 안건을 찬성 178표, 반대 120표로 승인했다. 이에 따라 그리스는 다음달 5일 채권단의 경제개혁안에 대해 찬반 국민투표를 실시하게 된다.
유로존은 치프라스 총리의 국민투표 제안을 협상을 그만두자는 뜻으로 받아들였다. 예룬 데이셀블룸 유로그룹 의장은 치프라스 총리가 채권단의 요구를 거부하고 국민투표를 제안해 유로그룹 회의가 빨리 끝났다고 밝혔다.
치프라스 총리가 국민투표를 실시하기로 한 것은 정치적 위험을 최소화하기 위한 것이다. 그는 올 초 총선에서 구제금융 조건인 강도 높은 긴축에 반대한다는 공약으로 집권했기 때문에 채권단의 경제개혁안을 수용할 수 없는 처지다. 그러나 그리스 일간 카티메리니의 최신 설문조사에서는 경제개혁안에 찬성한다는 답변이 47%로 반대(33%)를 훌쩍 웃돌았다.
하지만 국민투표를 둘러싼 위헌 및 실효성 논란이 만만치 않다. 그리스 헌법상 재정문제는 국민투표 안건이 될 수 없다는 지적이 일고 있는 가운데 기존 구제금융 프로그램이 오는 30일 끝나기 때문에 이를 연장하는 내용의 협상안을 국민투표에 부치는 것은 무의미하다고 전문가들은 지적한다. 라가르드 총재도 이날 BBC 회견에서 "그리스의 국민투표는 더 이상 유효성이 없는 안건에 대한 것"이라고 지적했다.
◇뱅크런·자본통제 촉각…29일 은행 문 열까
그리스 사태가 파국으로 치닫자 그리스 정부의 자본통제가 임박했다는 관측이 힘을 얻고 있다. 파이낸셜타임스(FT)는 구제금융 협상이 끝내 불발된 상황에서 그리스의 금융시스템 붕괴를 막기 위해 쓸 수 있는 카드는 은행 문을 임시로 닫거나 자본통제에 나서는 수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블룸버그는 이날 그리스 은행권 고위 임원 2명의 말을 빌려 이날 오전 현재 그리스 전역에 있는 7000여개의 현금자동입출금기(ATM) 가운데 500개 이상이 텅 비었다며 긴급 유동성 지원이 없으면 일부 은행이 29일 문을 열지 못할 것이라고 전했다. 이날 하루 사이 ATM에서 인출된 예금은 5억-6억유로에 이르는 것으로 추산된다. 이에 따라 일부 은행들은 이미 하루 현금 거래액을 제한하고 나섰다.
그리스 중앙은행은 현재 유럽중앙은행(ECB)의 긴급유동성지원(ELA) 프로그램을 통해 시중은행에 긴급자금을 대출해 뱅크런에 대응하고 있다. ECB는 매주 ELA 상한 확대 여부를 결정한다. ECB 정책위원회 위원 3분의 2가 찬성하면 ELA 확대에 제동을 걸 수 있다. ELA 한도가 상향되지 않으면 29일 은행들이 문을 못 여는 것은 물론 아테네 증시가 휴장할 수 있다는 관측도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