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16위 은행으로 예금이 1750억달러에 이르는 실리콘밸리 은행(SVB)이 지난주 파산했다. 미국 금융당국은 시스템 위기로 번지는 것을 막기 위해 예금자보호와 관계없이 고객들이 SVB에 맡긴 예금을 전액 지급하겠다고 밝혔다.
다른 은행으로 연쇄적인 뱅크런(예금 대량 인출) 사태가 발생하는 것을 방지하고 SVB에 거액의 자금을 예치해둔 실리콘밸리 스타트업들을 보호한다는 명목이다.
하지만 SVB의 자산 매각대금이 고객들에게 돌려줘야 할 예금에 못 미치면 모자라는 돈은 정부가 지급해야 한다. 정부가 책임져야 하는 돈은 결국 국민의 세금에서 나온다. 전 세계 자본주의의 심장인 미국은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때 구제금융에 이어 다시 한번 도덕적 해이(모럴 해저드)의 전례를 만든 것이다.
SVB가 망한 것은 연준(연방준비제도)의 급격한 금리 인상 때문이라고 하는데 이는 문제의 핵심을 회피하는 변명일 뿐이다. 환경의 변화에 대응해 리스크를 관리하지 않은 SVB와 리스크를 알면서도 SVB에 거액의 돈을 맡긴 스타트업이 이번 SVB 사태의 근본 원인이다.
2020년 1월에 550억달러였던 SVB의 예금은 2022년 말 1860억달러로 3년만에 3.4배가 폭증했다. 예금 증가의 대부분은 기업공개(IPO)와 기업인수목적회사(SPAC) 거래로 조달된 자금이었다. SVB는 지난 2년간 IPO를 통해 조달된 전체 자금의 거의 절반을 예금으로 유치했다.
SVB가 IPO와 SPAC 관련 자금을 사실상 독식할 수 있었던 이유는 실리콘밸리 기업들과 돈독한 관계 덕분이었다. SVB 대출의 절반 이상은 벤처캐피탈에 제공됐다. 벤처캐피탈의 투자를 받는 스타트업들은 자연스럽게 SVB를 이용하게 됐다.
게다가 SVB는 기업 고객들에게 경쟁 은행보다 약 0.6%포인트 더 많은 이자를 지급했다. 스타트업들로선 예금자보호 한도인 25만달러를 초과하는 기업 자금 대부분을 SVB에 맡길 만한 유인이 충분했다. 고금리 유혹에 리스크 관리의 제1 원칙인 자산 다각화를 간과한 것이다. 이 결과 SVB의 전체 예금 중 예금자보호 대상은 11%에 불과했다. 그만큼 기업 고객들의 거액 예금이 많았다는 의미다.
은행은 통상 예금 대부분을 대출로 제공해 예대금리 차이로 수익을 거둔다. 하지만 코로나 팬데믹 기간에는 정부 지원금이 많은데다 금융시장도 호황이라 대출 수요가 많지 않았다.
이 때문에 SVB는 늘어난 예금 대부분을 국채와 주택담보대출 증권에 투자했다. 그럼에도 SVB의 전체 자산 중 증권 투자가 차지하는 비중이 57%로 다른 은행들의 평균 24% 대비 두 배가 넘는다는 사실은 SVB가 얼마나 리스크 관리에 둔감했는지 변명의 여지가 없게 만든다.
더 큰 문제는 고금리 욕심에 만기가 짧은 예금을 받아 장기 채권에 투자했다는 점이다. 당시 단기 채권 금리는 연 0.25%였던 반면 SVB가 800억달러를 투자한 10년 만기 주택담보대출 증권은 연 1.5%였다.
더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제롬 파월 연준 의장이 지난해 내내 금리를 더 올린다고 반복해서 강조했음에도 SVB는 금리 스왑을 통한 헤지를 거의 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SVB는 1200억달러를 채권에 투자했고 평균 듀레이션은 5.6년인데 2021년 12월 기준으로 금리 스왑의 보호를 받는 금액은 100억달러로 10%도 안 됐다.
SVB는 지난해 금리가 오르고 주식시장이 급락하면서 IPO와 SPAC 거래가 사실상 개점 휴업 상태에 돌입한 가운데 자금이 부족해진 스타트업 고객들이 예금 인출이 늘어나는데도 이전과 다름 없는 영업 방식을 고수했다. SVB는 지난해 2~4분기 동안 예금이 13% 감소했고 예금은 올 1월과 2월에도 계속 줄었다.
더 놀라운 사실은 은행 영업 환경이 급변한 지난해에 SVB는 무려 8개월이나 최고리스크책임자(CRO)가 공석인 채 그레그 베커 최고경영자(CEO)가 리스크 위원회에 참석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이는 리스크 관리를 위해 베커 CEO를 견제할 만한 시스템의 부재를 의미한다. 게다가 베커 CEO는 SVB가 파산한 지난 10일까지 샌프란시스코 연방준비은행의 이사회 멤버였다.
SVB가 일반적인 은행과 다른 행태의 영업과 투자를 했는데도, CRO가 장기간 공석이었음에도 이를 미리 감지하고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는 것은 결국 글로벌 금융위기에 이어 또 한번 미국 금융 시스템의 실패를 의미한다.
SVB 예금자에 대한 무제한 예금 지급은 미국 납세자들만의 비용이 아니다. 미국은 기축통화국이다. 돈이 없으면 돈을 찍어내 쓰면 된다. SVB 예금자를 구제하기 위해 들어가는 비용은 달러를 기축통화로 받아들인 전 세계의 비용이기도 하다는 점에서 이번 SVB 사태는 더욱 씁쓸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