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프랑스가 gkaRp 추진하던 유럽형 6세대 전투기 제작 사업이 9년 만에 무산됐다. 양국 정치권이 중재에 나섰으나 사업 당사자인 에어버스와 다쏘 간 갈등을 꺼트리지 못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강조하는 자력 방위를 유럽이 해낼 수 있겠느냐는 의문이 나온다.
유로뉴스 등 외신을 종합하면 독일 정부는 "기업들이 차세대 전투기 공동 제작에 합의하지 못할 것이란 결론에 이르렀다"며 프랑스, 스페인과 함께 추진한 미래전투항공시스템(FCAS) 전투기 개발·도입 사업을 추진하지 않기로 결정했다고 8일(현지시간) 밝혔다. 프랑스 엘리제궁도 "독일 당국이 관련 기업들을 계속 압박하기는 불가능하다는 판단을 내렸다"며 사업 무산 결정을 알렸다.
FCAS 전투기 사업은 프랑스의 라팔, 독일·스페인의 유로파이터 타이푼을 대체할 차세대 기종을 개발하는 것이 목표였다. 사업비 1000억유로(176조원)를 들여 2040년 실전 배치한다는 목표 아래 2017년부터 추진됐다. AI(인공지능), 클라우드 컴퓨팅을 결합한 전투 시스템과 드론 운용 체계가 탑재될 예정이었다. 이 사업은 유럽 방위 통합의 상징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사업 출발부터 순조롭지 않았다. 프랑스 측 참여 업체로 라팔 전투기 제작 경험이 있는 다쏘가 전투기 개발을, 독일·스페인이 지분을 가진 에어버스가 전투기에 탑재될 드론을 개발할 예정이었다. 두 기업은 지적 재산권과 수익 분배 문제로 갈등을 빚었고, 이는 사업 주도권 싸움으로 확대됐다. 다쏘는 전투기 개발을 맡은 쪽이 사업 전체를 주도해야 한다는 입장이었고, 에어버스는 다쏘의 하청업체로써 프로젝트를 진행할 생각이 없다고 맞섰다.
프랑스, 독일 각자가 원하는 전투기 성능이 다르다는 점도 문제였다. 프랑스는 핵 무기를 탑재할 수 있고 항공모함에서 운용 가능한 전투기를 원했다. 반면 항공모함이 없는 독일은 지상 기지에서 출격해 제공권 장악 작전을 수행할 수 있는 대형 전투기를 바랐다. 이에 기욤 포리 에어버스 CEO(최고경영자)가 올해 초 각국 요구에 맞는 전투기를 별도 개발하자는 제안을 했다. 입장 차이를 재확인한 것에 불과한 제안이었고 다쏘와 에어버스 관계는 더 멀어졌다.
우크라이나 전쟁도 사업 무산의 배경이 됐다. 낮은 가격으로 대량 투입할 수 있는 드론이 우크라이나 전장에서 두각을 드러내면서 천문학적 예산이 드는 전투기에 대한 필요가 줄어들었다. 프리드리히 메르츠 독일 총리는 지난 2월 팟캐스트 방송에서 "20년 후에도 유인 전투기가 필요하겠느냐"며 유인 전투기 사업에 예산을 투입하는 것은 부적절할 수 있다는 의견을 밝혔다.
또 러시아가 2030년 우크라이나를 넘어 나토(NATO·북대서양조약기구) 회원국를 직접 공격할 것이란 가설이 수면 위로 떠올랐다. FCAS 전투기는 개발되더라도 2040년 실전 배치될 예정이었다. 시급성 면에서 이 사업에 예산을 들일 여유가 없는 셈이다.
이번 전투기 사업 무산에 대해 BBC는 "FCAS 전투기 프로젝트는 전례 없는 (유럽) 군사 협력 사업으로 야심차게 홍보됐지만 국가 간 갈등을 극명히 드러내는 사례가 됐다"며 "공동 전략 목표를 갖고 행동할 수 있음을 보여주려는 유럽의 노력이 약화됐다"고 설명했다.
일단 독일은 에어버스를 앞세워 자국 수요에 맞춘 차세대 전투기 개발 사업을 이어나갈 것으로 보인다. 파이낸셜뉴스(FT)는 독일 베를린에서 10일부터 닷새 간 열리는 에어쇼에서 에어버스를 비롯한 8개 항공·방산기업이 '팀 젠6'이라는 이름으로 새 사업을 발표할 수 있다고 보도했다. FT는 스웨덴 방산기업 사브 또는 영국·이탈리아·일본이 공동 개발 중인 글로벌 전투항공 프로그램(GCAP)이 새 사업에 협력할 가능성도 열려있다고 했다.
일각에서는 전투기 사업에 이어 프랑스·독일의 첨단 전차 개발 사업도 좌초 위기를 겪는 것 아니냐는 관측이 나온다. 이 사업은 독일 레오파르트2와 프랑스 르클레르를 대체할 차세대 전차를 개발하는 것이 목표인데 사업 지분 다툼 때문에 지지부진하다. 트럼프 행정부의 자력방위 요구를 수용해 방위비를 대폭 증액 중인 독일은 프랑스와 사업 지분을 나누는 문제 때문에 불만이 상당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