케빈 워시 신임 미국 연방준비제도(Fed, 이하 연준) 의장이 인공지능(AI)의 등장이 생산성을 향상시켜 물가를 안정시킬 수 있다고 밝히면서 해당 주장의 검증에 시장의 관심이 쏠리고 있다. AI가 디스인플레이션(물가상승률 하락)을 촉발한다는 것이 확인되면 연준이 금리 인하에 나서는 명분을 제공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경우 AI를 통해 경제성장과 물가안정을 동시에 달성할 수 있게 된다.
워시 의장은 지난달 17일(현지시간) 처음으로 연방공개시장위원회(FOMC)를 주재하고 △커뮤니케이션 △대차대조표 △데이터 활용 △생산성과 일자리 △인플레이션 프레임워크 등 통화정책 수행과 관련된 5개 태스크포스(TF)를 구성하겠다고 밝혔다. 시장에서는 특히 생산성과 일자리 관련 TF가 주목받고 있다. 연준은 해당 TF에서 AI가 생산성과 일자리, 물가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분석할 예정이다.
AI와 물가안정 관련 논란은 연준 의장 유력 후보자였던 워시 의장이 지난해 11월 월스트리트저널에 'The Federal Reserve's Broken Leadership'(무너진 연준 리더십)이라는 제목의 기고를 하며 대두됐다. 당시 워시 의장은 해당 기고문에서 "AI는 생산성을 높이고 미국의 경쟁력을 강화하는 상당한 디스인플레이션 요인이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또 "AI는 발명의 방식과 혁신의 속도 모두를 근본적으로 바꾸고 있다"고 강조했다.
간단히 말해 AI가 생산성을 높이고, 생산성 향상이 물가를 낮춘다는 것이다. 과연 그럴까.
우선 AI가 생산성을 높인다는 것이 무슨 말인지 살펴보자. 생산성이란 같은 노동·시간·자본 등을 투입했을 때 얼마나 많은 재화·서비스를 생산하는지를 말한다. 예컨대 1시간에 제품 1개를 생산하는 노동자 A와 1시간에 제품 2개를 만드는 노동자 B가 있다면 B가 A보다 생산성이 2배 높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런데 생산성 향상은 기술의 영향을 가장 크게 받는다. 곽종철 밀양대 박물관 학예연구원이 연구·발표한 결과에 따르면 고려 전기 논 1마지기(약 300평)당 쌀 생산량은 약 33.7~72kg이었다. 반면 2024년 기준 10a(약 302.5평)당 쌀 생산량은 514kg으로 나타났다. 면적당 쌀 생산량이 약 7~15배 늘어난 것이다. 현대 대한민국의 농부가 고려 전기 농부보다 7~15배 더 열심히 일한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비료·종자 개량 등 발달한 농업 기술과 농기계의 사용 등이 생산량에 큰 영향을 줬다고 할 수 있다.
생산성 향상이 물가를 낮춘다는 것은 위의 예를 고려해보면 '중장기적' 시야에서 옳다고 할 수 있다. 정확한 가격 비교는 쉽지 않지만 전근대 시대 쌀값과 최근 가격을 고려하면 생산성 향상이 물가를 낮춘다는 말은 타당한 것으로 보인다.
워시 의장의 주장은 AI가 농업에서 비료·종자 개량·트랙터와 유사한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워시 의장은 해당 기고에서 "(AI에 의한) 생산성 개선은 실질임금의 상당한 증가를 이끌어야 한다. 연간 생산성 증가율이 1%포인트(P) 높아지면 한 세대 안에 생활 수준은 두 배가 될 것"이라고 밝혔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실질임금의 상당한 증가'라는 말이다. 실질임금은 임금을 화폐가 아닌 소비 가능한 재화·서비스로 측정한 것이다. 간단히 말해 실질임금이 오른다는 것은 개인에게는 월급 오르는 속도가 물가 상승 속도보다 빠르다는 것을 뜻한다.
워시 의장의 발언은 IT(정보통신기술)에 대한 앨런 그린스펀 전 연준 의장의 판단을 떠올리게 한다. 그린스펀 전 연준 의장은 1999년 5월 "경기순환 효과를 넘어선 노동생산성 증가율의 상승은 인플레이션 둔화의 핵심 요인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1990년대 초반 연평균 1% 미만이던 노동생산성 증가율은 1999년 1분기까지의 4개 분기 동안 약 3%로 상승했다"며 "우리가 정보기술이라고 부르는 최신 혁신들은 우리가 사업을 하고 가치를 창출하는 방식을 바꾸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워시 의장의 주장에 대한 반론도 만만치 않다. 가장 강한 반론은 'AI 혁명이 투자 붐을 일으켜 단기적으로 물가상승을 자극한다'는 것이다.
제이피모간 에셋매니지먼트(J.P.Morgan Asset Management)는 지난 4월 20일 '인공지능, 인플레이션, 이자율(AI, Inflation and Interest Rates)'이라는 제목의 노트를 통해 "단기적으로는 AI 개발에 투입되는 막대한 지출이 디플레이션(물가하락)보다는 인플레이션(물가상승) 요인일 가능성이 크다"며 "생산성 향상의 결실이 나타나기 전에 추가 수요가 먼저 경제에 충격을 주고 있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제이피모간 에셋매니지먼트는 구체적으로 AI 투자가 △전력 △반도체 △데이터센터 건설 노동자 수요 등을 자극해 단기적으로 물가를 올릴 수 있다고 설명했다.
이는 실제로 쉽게 관찰할 수 있는 현상이다.
애플은 지난달 25일 맥북과 아이패드 가격을 모델에 따라 100달러~300달러 인상한다고 밝혔다. 애플은 보도자료를 통해 "AI 데이터센터의 확대로 메모리 수요가 폭발적으로 증가해 여러 제품의 가격을 인상하기 시작해야 하는 시점에 도달했다"고 했다.
마이크로소프트도 같은 날 엑스박스 콘솔 가격을 100달러~150달러 올린다고 발표했다. 콘솔용 저장장치와 메모리 가격이 2.5배 올랐다는 게 가격 인상 이유다.
전기요금도 상승했다. 제이피모간 에셋매니지먼트에 따르면 미국의 3월 소비자 전기요금은 전년 동월 대비 4.6% 상승했다. 같은 기간 전력 생산은 전년 대비 3% 늘었다. 제이피모간 에셋매니지먼트는 "10년 넘게 증가가 없었던 미국 전력 생산이 2024년 2.5%, 2025년 2.4% 증가했는데, 증가의 상당 부분은 데이터센터 소비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AI 도입에 따른 생산성 향상이 얼마나 크게 나타날 것인지에 대한 의견도 분분하다. 이는 AI 관련 투자가 물가 상승을 유발할 수 있다는 비판보다 근원적인 문제제기가 될 수 있다. AI 관련 투자에 따른 물가 상승은 일정 기간이 지나면 완화되지만, 생산성 향상 효과가 크지 않을 수 있다는 주장은 'AI가 생산성을 향상시키고 생산성 향상이 물가하락을 부른다'는 워시 의장의 논리 자체를 무너뜨릴 수 있다.
비관적인 전망들은 AI 도입에 따른 생산성 향상이 연평균 1%를 넘지 못할 것으로 본다.
국제결제은행(BIS)은 지난달 28일 발표한 '2026 연례 경제 보고서(Annual Economic Report 2026)'에서 "장기적인 관점에서 총 생산성 증가 추정치는 1% 미만"이라며 "이는 기술을 대규모로 도입하고 생산 공정을 통합하는 데 따르는 어려움을 반영한다"고 밝혔다.
필립 레인 유럽중앙은행(ECB) 수석이코노미스트는 지난 3월 23일 기후-거시금융 연계 국제회의 기조연설에서 "가장 낮은 추정치로 대런 아세모글루 MIT 교수는 (AI 도입에 따른) 향후 총요소생산성(TFP) 증가율이 0.66%를 넘지 않을 것으로 예상했다"고 말했다.
AI 도입으로 약 1%의 잠재적 생산성 향상이 예상되지만 실제 생산 증가로 이어지려면 시간이 필요하다는 분석도 있다.
한국은행이 지난달 8일 발표한 'BOK 이슈노트, AI 도입은 생산성을 높이는가? 초기 3년의 효과 분석' 보고서에 따르면 AI 활용은 약 1%의 잠재적 생산성 향상 효과가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단 해당 수치는 실제 생산량 증가가 아닌 근로시간 단축으로 나타났다. 같은 양의 재화·서비스를 생산하는 데 필요한 시간이 줄어들었다는 면에서 생산성이 향상됐지만, 실제 생산량이 늘어난 것은 아니라는 뜻이다.
쉽게 말해 하루 8시간 일하고 월급 300만원을 받던 사람이 하루 6시간 일하고 월급 300만원을 받게 됐다는 것이다. 통계적·회계적으로 생산성 향상의 효과를 확인하려면 8시간 일하는 사람의 월급이 AI 활용으로 350만원이 돼야 한다.
서동현 한은 과장은 해당 보고서에서 "현재 AI는 효율성 단계에는 진입했으나 생산성의 단계로는 충분히 전환되지 못한 상태"라며 "향후 정책 대응과 기업조직, 노동시장 구조 전환에 따라 생산성 경로가 달라질 수 있다"고 밝혔다.
다만 현재 가진 정보·데이터만으로 AI가 생산성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 비관적인 결론을 내리는 것은 위험할 것으로 보인다. 최근 몇 년간 AI의 발달 속도가 눈부시기 때문이다. 2022년 11월 공개된 챗GPT(ChatGPT) 3.5는 모의 미국 변호사시험에서 하위 10%에 해당하는 성적을 받았다. 이후 공개된 GPT-4는 상위 10% 성적을 냈다.
제이피모간 에셋매니지먼트는 "모든 기술혁명에서 그렇듯 도입은 잠재력보다 늦고, 효율적 사용은 도입보다 더 늦을 것"이라며 "AI의 능력과 사용은 매우 빠른 속도로 증가하고 있다"고 밝혔다.
또 워시 의장은 지난 1일 유럽중앙은행(ECB) 주최로 포르투갈 신트라에서 열린 중앙은행 포럼에서 "AI 모델의 개선 속도가 매우 빠르기 때문에, 지금은 기업 설문에서 큰 변화가 없다고 나오더라도 6개월 뒤에는 완전히 다른 결과가 나올 수 있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