냉전기 구축된 미국의 '확장 핵억지(Extended Deterrence)' 체제는 변화된 국제정세와 미국의 대외 정책을 반영하지 못하므로 새로운 억지 구조가 필요하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제니퍼 린드 다트머스 대학교 정치학과 부교수, 대릴 G. 프레스 데이비드슨 국제안보연구소 소장은 최근 포린 어페어스 기고문 '부서진 핵우산(The Broken Nuclear Umbrella)'에서 "미국이 자신의 파괴 위험을 감수하면서 아시아와 유럽 동맹국들을 위해 핵전쟁을 벌일 것이라는 약속을 신뢰하기 어려워졌다"며 "미국은 기존 핵우산의 신뢰성을 유지하는 것을 넘어 동맹국들이 자율적인 핵억지 체계를 갖추도록 적극적으로 지원해야 한다"고 밝혔다.
저자들은 먼저 미국의 확장억지 체제가 냉전기의 상충된 두 가지 목표에서 출발했다고 짚었다. 미국은 소련의 공격으로부터 아시아와 유럽의 동맹국을 보호하기 위해 핵무기가 필요하다고 판단했지만, 동시에 수십 개 국가가 핵무기를 보유하는 상황도 원치 않았다. 이에 동맹국들이 독자 핵무장을 포기하는 대신 미국의 핵우산 아래에서 보호받는 확장억지 체제를 구축했다는 설명이다.
저자들은 이러한 체제가 '냉전'이라는 특수한 환경 속에서 신뢰성을 확보할 수 있었다고 평가했다. 미국은 소련이 유럽을 점령할 경우 태평양에서 영국해협에 이르는 광범위한 지역을 장악할 수 있고, 한반도의 공산화 역시 동아시아 전체의 공산화로 이어질 수 있다고 판단했다. 동맹국의 패배가 미국의 패권과 안보에 위협을 초래하기 때문에, 미국이 핵전쟁 위험을 감수하면서 동맹을 보호할 것이라는 주장은 설득력을 가질 수 있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미국의 확장억지 체제에 균열이 생기기 시작한 것은 소련이 붕괴한 1990년대 초부터다. 냉전 이후 미국이 직면한 위협은 국가의 존립이나 세계적 세력균형을 좌우하는 문제가 아니라 지역분쟁의 성격을 띠게 됐다. 이에 따라 미국이 멀리 떨어진 동맹국을 위해 핵전쟁의 위험까지 감수할 가능성도 점차 낮아졌다는 것이다.
특히 최근 트럼프 행정부의 '미국 우선주의'는 미국의 핵우산에 대한 불신을 더욱 키운 요인으로꼽힌다. 동맹의 가치를 미국 국익에 대한 기여 여부로 판단하는 것은 동맹국을 위해 미국이 막대한 희생을 감수하겠다는 확장억지의 논리와 충돌한다는 것이다. 저자들은 "동맹국의 입장에서 자국의 이익을 최우선으로 하는 미국의 핵공약에 국가의 생존을 계속 맡기는 것은 지나치게 위험한 도박"이라고 짚었다.
한반도는 확장억지 위기가 가장 심각하게 드러나는 지역으로 지목됐다. 북한은 이미 50~90개의 핵무기를 확보한 것으로 추정되며, 핵전력을 재래식 전력에 통합하고 있다. 만약 북한의 핵무기가 계속 고도화되고 미국 도시를 직접 타격할 수 있는 능력까지 갖추게 되면 미국의 정책결정자들은 한국을 보호하기 위해 핵무기를 사용할지를 더욱 주저하게 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더욱이 미국은 한반도에서 확장억지의 신뢰성을 뒷받침해 온 장치들을 점차 축소해 왔다. 주한미군 병력을 줄이고 일부 전력을 비무장지대에서 남쪽으로 이동시켰으며, 1991년에는 전술핵무기를 철수했다. 저자들은 이러한 조치들과 트럼프 행정부의 동맹 경시, 미국 우선주의까지 더해지면서 한국이 미국의 핵우산을 신뢰하기가 더욱 어려워졌다고 평가했다.
저자들은 한국이 핵억지력을 강화하기 위한 방안으로 독자 핵무장 가능성까지 고려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한국은 그동안 경제제재와 외교적 고립, 북한의 예방공격 가능성 등을 이유로 독자 핵무장에 신중한 태도를 보여 왔다. 그러나 미국의 핵공약을 신뢰하기 어려워진 상황에서 한국 지도자들은 미국의 약속에 국가 생존을 맡길 수 없다고 판단할 수 있다는 것이다.
저자들은 한국이 핵탄두를 제외한 핵전력의 주요 기반을 상당 부분 갖추고 있다는 점에도 주목했다. 잠수함과 전투기, 다수의 군 비행장과 방호시설, 이동식 지상발사 미사일 등 핵보복 전력을 구성하는 데 필요한 운반수단과 기반시설을 이미 확보했다는 평가다. 저자들은 "미국은 그동안 한국의 독자 핵무장을 억제해 왔지만, 미국의 신뢰성이 계속 약해질 경우 한국의 핵개발 선택을 막기 어려울 것"이라고 전망했다.
만약 한국이 핵공유를 요구할 경우 미국은 이를 적극적으로 수용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한미 핵공유는 한국의 독자 핵무장으로 발생할 수 있는 외교적·전략적 충격을 피하면서도 한반도의 억지력을 강화할 수 있는 방안이라는 것이다.
한국과 달리 동유럽 국가들이 독자 핵무장을 추진하는 것은 현실적인 해법이 아니라고 분석했다. 역내 군사강국인 폴란드조차 안정적인 핵억지력을 구축하는 데 필요한 운반수단과 핵물질 생산 기반을 충분히 갖추지 못했기 때문이다. 러시아와 지리적으로 가까워 공군기지에 배치한 핵무기가 선제공격에 취약하다는 점도 주요 제약으로 꼽혔다.
이에 동유럽에서는 개별 국가의 독자 핵무장보다 기존 나토 핵공유 체제를 개편해 동맹 전체의 억지력을 강화하는 방안이 적절하다고 봤다. 다만 현행 체제에서 핵무기의 사용에 대한 최종 결정권이 미국 대통령에게 있는 만큼 프랑스, 영국 등이 핵무기 및 결정권을 공유해야 한다는 제안도 이어졌다. 저자들은 "미국이 핵무기 제공을 거부하더라도 프랑스나 영국이 핵공유를 승인하면 나토의 핵억지력이 유지되고 동유럽에 대한 방위공약의 신뢰성도 높아질 수 있다"고 주장했다.
저자들은 미국이 기존 확장억지 체제를 유지하길 원하겠지만 이러한 선택이 오히려 미국과 동맹국 모두에게 더 큰 위험을 초래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동맹국들이 미국의 약속을 신뢰하지 못해 비밀리에 핵무장을 서두르거나, 적대국이 미국의 방위공약을 허세로 판단해 공격에 나설 경우 예방공격이나 급격한 확전으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저자들은 미국이 동맹국의 선택을 일방적으로 막기보다 변화한 안보환경에 맞춰 억지체제를 재편하고, 그 과정에서 발생할 수 있는 충돌과 동맹의 불안정을 관리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어 미국은 과거가 아니라 오늘날의 현실에 맞는 억지전략을 새롭게 구축해야 한다고 제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