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탕수수 노동자로 떠난 이민자, 700만 韓商으로 화려한 귀환

사탕수수 노동자로 떠난 이민자, 700만 韓商으로 화려한 귀환

유영호 기자
2012.06.27 05:26

[쇄국하던 코리아, 개방 아이콘 되다 下]인종차별 극복하고 주류사회 진입…韓경제 선봉

1902년 12월 22일 인천 제물포항. 차가운 새벽공기를 뚫고 한 무리의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이들이 이곳에 온 사연은 제각각이었지만 눈빛에는 하나같이 새로운 세상에 대한 호기심과 희망이 서려 있었다.

↑한인 이민자들을 싣고 하와이로 떠난 미국 증기선 게일릭호.
↑한인 이민자들을 싣고 하와이로 떠난 미국 증기선 게일릭호.

그렇게 모여든 56명의 남자와 21명의 여성, 25명의 어린이 등 모두 102명의 한인 이민자들은 미국 증기선 게일릭호 3등석에 몸을 실고 미국 하와이로 떠났다. 당시 한국에서 이민자들을 모집했던 미국인 윌리엄 데슐러는 게일릭호 선상에서 사탕수수농장 주인에게 이렇게 편지를 보냈다.

"한인들은 모두 건강하고 사기도 높습니다. 먼 뱃길에 불편하고 낯설겠지만 묵묵히 견뎌내는 이들의 인내심에 저 또한 감탄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가난을 피해 조국을 떠난 102명으로 시작한 초라한 이민의 역사는 110년이 지난 지금 700만 명의 재외동포로 성장했다. 사탕수수 노동자에 지나지 않았던 이민자들의 지위도 인종차별 등 숱한 걸림돌에도 밑바닥부터 꾸준히 경제활동을 펼쳐온 저력에 힘입어 당당하게 주류사회 줄기로 자리잡아가고 있다.

◇맨손으로 일군 '아메리카 드림'=1903년 하와이에 첫 이민자들이 도착한 뒤 2년간 7000여 명의 노동자와 가족이 하와이로 이주했다. 이들의 임금은 당시 돈으로 하루 65센트, 월 16달러에 불과했다. 얼마 뒤 이들 중 2000여 명이 미국 본토로 이주했다. 대부분 캘리포니아에 정착한 한인들은 식당종업원, 청소부, 가정부, 정원사 등 닥치는 대로 일을 하며 억척스레 돈을 모았다.

↑1903년 하와이 사탕수수 노동자로 이주한 한인들
↑1903년 하와이 사탕수수 노동자로 이주한 한인들

1910년 2월9일 리버사이드 카운티 레드랜드의 한인들이 자본금 3000달러(주당 50센트)로 한인 최초의 주식회사인 '흥업주식회사'를 설립했다. 이후 한미무역(1910년), 허 리 상회(1911년), 한인농상(1914년), 북미상업(1917년) 등 업체들이 속속 생겨났다. 대부분 쌀 재배와 농산물 교역이 주업이었다.

1920년대에는 한인 최초의 백만장자가 탄생했다. 1921년 프레스노 인근에서 청과물 재배 및 유통업을 하던 '김 브라더스'의 김호, 김형순이 그들. 30여 년간 매년 100만 달러 이상의 매출을 올린 두 김씨는 오늘날 LA 다운타운 청과상의 출발점이 됐다. 당시 회사들은 회사 이윤으로 독립운동 자금을 모으는데 힘썼다.

비록 실패했지만 흥사단이 세운 북미실업과 대동실업(1917년), 동지회가 세운 동지식산회사(1925년)는 독립운동자금이 설립 목적이었다. 조국 광복과 한국 전쟁기를 거치며 한인경제는 한동안 소강상태를 거쳤다. '김 브라더스' 등 몇몇 회사만 명맥을 유지했다.

◇'한국인 DNA'로 주류사회 진입=1960년대 이후 한상(韓商)의 도약은 본격화된다. 1965년 개정 이민법 통과, 1972년 대한항공의 서울-로스앤젤레스(LA) 노선취항으로 미국으로의 진출이 봇물을 이뤘다. 가발에 이어 봉제·의류 업체가 잇따라 설립됐다.

이민 초기 20만 달러에 달하는 빚을 지고도 포기하기 않고 미국인의 40%가 애용하는 제품을 개발해 미국의 '모자왕'으로 부상한 조병태 소네트 회장을 비롯해 미국 가발시장의 대부 정진철 로열아이맥스회장, 코리안 워런 버핏으로 불리는 고석화 월셔은행 회장 등이 대표적 사례다.

호주, 동남아시아, 남아메리카 등 미주지역 이외로의 진출이 본격화된 것도 이 시기다. 단돈 500달러로 말레이시아에 진출해 외국인 최초로 백작 작위를 받은 권병하 헤니권코퍼레이션 회장, 호주에서 운전면허도 없이 하루에 500㎞ 이상을 달리며 선박에 식품을 납품하며 천용수 코스트그룹 회장, 파라과이 이민 후 강제추방의 위험을 무릅쓰고 브라질로 건너가 최대 여성의류 기업을 키워낸 이도찬 에센시아 회장 등이 대표적이다.

이들은 언어와 인종차별은 온갖 장애물을 끈기와 열정, 도전정신이라는 한국인 특유의 유전자를 바탕으로 극복하고 당당히 주류사회의 한 줄기로 도약, 한국 경제의 국경을 넓히고 있다.

◇700만 한상, 한국경제 지킴이 =해외에서 성공했지만 우리 경제발전에는 별다른 도움이 되지 못한다고 여겨져 잊혀진 존재인 한상의 진가를 드러낸 것은 외환위기라는 초유의 국난이었다. 한상을 중심으로 한 재외동포들은 1997년 한 해 동안 1537만 달러를 국내로 송금해 외환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힘을 보탰다.

특히 한상들은 미국과 일본에 집중됐던 우리나라의 수출처를 다변화하는 '해외진출의 첨병' 노릇을 톡톡히 했다. '한국의 무역증진에 기여하고, 한국 상품 해외시장 진출에 공헌한다'를 공통의 가치로 삼고 한국 제품을 우선적으로 구매해 우리 중소기업의 우수성을 세계 각국에 알렸다.

한상들의 모임인 세계한인무역협회(월드옥타)는 매년 국내 지방 중소기업들의 수출 판로 개척을 돕기 위한 '수출상담회'를 개최하고 있다. 지난 4월에는 강원도 평창 알펜시아에서 수출상담회를 열고 계약 상담실적 4200만 달러, 수출 계약 체결 410만 달러의 성과를 올렸다. 최근 5년간 누적 실적은 15억 달러에 달한다.

인력양성 기능도 주목된다. 월드옥타의 경우 '한민족 경제영토 확장'을 목표로 국내 청년 1만 명을 대상으로 해외 인턴십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회원사로 나가는 인턴은 단순 사무보조가 아닌 실제 경영현장에서 실무를 보게 되며 원하는 경우 현지에서 정식 취업도 가능하다.

노영기 중앙대 경제학 교수는 "국경의 의미가 희미해지는 요즘 한상들이 한국의 경제 영토로 모국 경제에 기여할 부문이 커지고 있다"며 "특히 '한민족 경제 네트워크'는 구축비용은 거의 제로인 반면 이 네트워크가 경제활동에서 창출하는 가치는 무한대"라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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