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쿠시마 원전사고 3년 "아직도 바람불면 창문 못 열어요"

후쿠시마 원전사고 3년 "아직도 바람불면 창문 못 열어요"

황보람 기자
2014.03.09 04:57

탈핵 티셔츠 프로젝트 나선 윤호섭 그린(Green) 디자이너 인터뷰

생태 예술가이자 국민대 시각디자인학과 명예교수 윤호섭 디자이너(71).
생태 예술가이자 국민대 시각디자인학과 명예교수 윤호섭 디자이너(71).

11일이면 일본 후쿠시마 원전 사고도 3주기를 지난다. 기억의 왜곡일까. 꺼림칙해 하던 생선도 곧잘 먹게 됐다. 한국과 일본은 다시 역사 갈등에 촉수를 세운다. 한국은 향후 5년동안 유효한 에너지기본계획에서 원자력 중심 정책을 이어가기로 했다.

무심보다 아픈 건 절망이었다. 서두르지 않고 차분하게. 원전 사고의 방조자였던 우리들이 가져야 할 마음가짐이었다. 지난 2월 윤호섭 그린 디자이너(71·국민대 시각디자인학과 명예교수)는 그린피스와 함께 후쿠시마로 떠났다. 그곳에는 소를 잃은 낙농업자와 땅을 잃은 농부, 아이를 지켜야 하는 부모들이 있었다.

"모두가 어머니의 맘이 될 수는 없겠지요". 2011년 7월 초 세 아이를 데리고 후쿠시마 시내에서 19km 떨어진 다테시로 피난을 간 수가노 미나코씨(39)가 말했다. 아이들은 꼬박 3년을 집안에 갇혀 살았다. 미나코씨는 바람이 불지 않을 때에만 창문을 연다고 했다. '오염된 곳에서 덜 오염된 곳으로'. 엄마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싸움이었다.

일본도 대재앙 앞에서는 초라했다. 국민은 없었다. 갑상샘암에 걸린 사람들이 늘어났지만 정부에서 파견된 의사들은 "방사능 유출과는 관련이 없다"고 고개를 돌렸다. 아이들이 밖에 나가 놀아도 되느냐는 질문에 "1시간만 놀게 하라"고 답했다.

"아이들을 밖에 내보내지도 못하고 우리가 얻은 게 무엇인가요. 만물의 영장이라면서 이렇게 바보같은 짓을 했는데…나도 그 가담자가 아닌가. 가담자는 할 얘기가 없는 것 아닌가. '부끄럽습니다' 한마디 밖에는 할 수 있는 말이 없었습니다."

미나코씨를 만난 윤 교수는 아무 말도 못했다. "우리는 버려졌다"고 외치는 사람들에게 "애들이 불쌍합니다. 안됐습니다"라고 할 수는 없었다. 한국으로 돌아온 윤 교수는 미나코씨의 아이들에게 해와 달, 별을 그린 티셔츠를 보냈다. 집안에서라도 자연을 볼 수 있게 하고 싶었다.

윤호섭 교수(왼쪽)가 후쿠시마 사고 피해자인 전 낙농업자 하세가와 켄이치(Kenichi Hasegawa)씨에게 자신이 디자인한 탈핵 포스터를 보여주고 있다.
윤호섭 교수(왼쪽)가 후쿠시마 사고 피해자인 전 낙농업자 하세가와 켄이치(Kenichi Hasegawa)씨에게 자신이 디자인한 탈핵 포스터를 보여주고 있다.

"50대까지는 아무 것도 모르고 살았어요. 가난을 벗어나려고 경제경제 하다보니 우리가 여기까지 왔구나, 이제라도 내가 할 수 있는 걸 하자고 맘 먹었죠. 혼자 나서서 무슨 소용이 있을까 생각이 들 때마다 그저 내 생각과 내 삶, 내 재능으로 할 수 있는 걸 하자고 했습니다. 그 다음에는 어떤 섭리가 기다리고 있겠지 하는 마음으로요."

한국 그래픽 디자인 1세대. 윤 교수는 88올림픽 디자인에 참여하고 펩시콜라 한글로고를 제작할 정도로 대중적인 디자이너였다. 2002년부터는 티셔츠에 자연 그림을 그려주는 '인사동 티셔츠 할아버지'로 더 유명하다.

낡은 녹색 모자와 목도리, 기워입은 옷. 윤 교수 모습이었다. 서울 우이동 작업실엔 태양광 패널을 설치했다. 집엔 냉장고도 없다. 누군가는 굶어 죽는데 음식을 쌓아놓는 것이 마음에 걸렸다고 했다. 하지만 모두가 그래야 한다고 주장하지는 않았다. 환경에는 신경조차 쓰지 못할 정도로 우리 삶이 각박해진 건 모두의 책임이지 비난 대상은 아니라고 했다.

"아직 태어나지 않은 다음 세대가 '핵 발전 밖에 다른 대안이 전혀 없었나요?'라고 묻는다면 어떻게 답할 수 있을까요. 이런 질문을 계속 고민하고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일에 집중하는 게 결국 우리에게 주어진 몫이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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