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4년의 삶 중 69년을 영화배우로 살았던 사람. 배우 안성기가 세상을 떠났다. 몇 년 전부터 투병 소식이 들려왔고, 가끔 공적인 자리에 설 때도 회복되지 않은 모습을 보여 안타까웠지만, 막상 그의 부고를 실제로 접하게 되니 현실로 다가오지가 않는다. 편안한 미소와 따뜻한 인품으로 언제나 우리 곁에 있을 것만 같은 그였기에, ‘안성기의 죽음’은 영화인이나 관련자가 아닌 관객에게도 커다란 상실감으로 다가오는 충격이다.
안성기는 한국영화 역사 그 자체였던 배우다. 전쟁을 겪은 후 영화계가 힘겹게 재건하던 1950년대, 영화 기획자였던 부친(안화영)은 친구인 김기영 감독이 '황혼열차'(1957)를 찍을 때 아역 배우가 필요하자 당시 다섯 살이었던 아들을 현장으로 데려갔고, 이때부터 70여 편의 영화에 출연하며 한국영화의 황금기였던 1960년대에 충무로에서 가장 유명한 어린이·청소년 배우가 되어 '하녀'(김기영, 1960), '아낌없이 주련다'(유현목, 1962), '얄개전'(정승문, 1965) 등에 출연했고 김기영 감독의 '십대의 반항'(1959)로는 샌프란시스코영화제에서 특별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고등학교 진학과 함께 잠시 스크린을 떠난 그가 다시 돌아온 건 1970년대였다. 외국어대학교 베트남어학과를 졸업한 후 ROTC로 군 복무를 마친 20대 후반의 안성기는 갈 곳 없는 청춘이었다. 베트남이 공산화되면서 한국과 교류가 끊겼고, 전공이 무의미해진 그는 장교 출신이었음에도 취직이 쉽지 않았다. 이때 그를 다시 소환한 건 영화였다. 컴백 작품은 '병사와 아가씨들'(김기, 1977). 하지만 1970년대 한국 영화계는 침체기를 겪고 있었고, 과거의 아역 스타는 무명의 신인이 되어 쉽지 않은 시간을 보내야 했다.
이때 만난 이장호 감독의 '바람불어 좋은 날'(1980)은 그의 두 번째 데뷔작이 되었다. 그가 맡은 덕배라는 캐릭터는 그 시대의 민중을 우회적으로 표현한 인물이었고, 이후 안성기는 1980년대 한국영화의 이른바 ‘뉴웨이브’를 상징하는 배우가 된다. 이때 안성기는 중요한 결심을 한다. 에로티시즘과 멜로드라마와 코미디 일색이었던 한국영화의 트렌드를 벗어나, 뭔가 다른 영화에 출연하겠다는 것. 당시 배우들에겐 당연히 여겨졌던 겹치기 출연을 하지 않겠다는 것. 인간 관계나 출연료보다는 시나리오를 기준으로 작품을 선택하겠다는 것. 그리고 철저하게 사생활을 관리하겠다는 것. 안성기는 영화배우의 새로운 스탠더드를 만들었고, 그로부터 시작된 전통은 지금까지도 한국의 배우들에게 중요한 덕목으로 남아 있다.
여기서 주목할 부분은 그의 커리어가 지닌 힘이다. 한국영화가 폐허에서 다시 일어서던 1950년대에 시작된 안성기의 필모그래피는 황금기였던 1960년대를 경유했고, 한국영화가 곤두박질 치던 1970년대 말에 돌아와 1980년대의 뉴웨이브와 1990년대의 산업적 격변을 모두 경험했다. 2000년대 르네상스 시기에도 그는 한국영화의 중심부에 있었고, 60대가 되어도, 70대가 되어도 그는 현장에 있었다. 그러면서 그가 빚어낸 인물들은 한국영화 캐릭터의 보물창고라 할 만큼 넓은 스펙트럼을 지니고 있었다.
그는 소외된 민중(바람 불어 좋은 날, 1980)과 자본주의의 첨병(성공시대, 1988)를 오갔다. 그는 구도자(만다라, 1981)였고 낭인(고래사냥, 1984)이었으며 방랑자(안녕하세요 하나님, 1987)였다. 그는 수탈 당했고(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1981)였고, 도시 빈민(꼬방동네 사람들, 1982)이었으며 옥상 위의 페인트공(칠수와 만수, 1988)이었다. 그는 어느 땐 심각하게 욕망에 들떴다가도(깊고 푸른 밤, 1985), 순식간에 대책 없는 순애보 숭배자가 되고(기쁜 우리 젊은 날, 1987), 무기력한 남자(무릎과 무릎 사이, 1984)에서 광기 어린 야구감독(이장호의 외인구단, 1986)으로 탈바꿈했다.
그는 전장의 한가운데(하얀 전쟁, 1992)와 이념의 골짜기(남부군, 1990)와 대립의 현장(태백산맥, 1994)을 건너 비극적 역사의 공간(화려한 휴가, 2007)으로 나아갔다. 정치부 기자(누가 용의 발톱을 보았는가, 1991)였던 그는 어느새 강남의 비리 경찰(투캅스, 1993)을 거쳐 삶에 찌든 샐러리맨(남자는 괴로워, 1995)으로 시들어갔다. 차가운 도시 남자(그대 안의 블루, 1992)인가 싶더니 사실은 판타지 속의 남자(미술관 옆 동물원, 1998)였으며, 궁중의 내시(내시, 1986)인가 싶었지만 어느새 왕이 되어 있었다(영원한 제국, 1995). 지극히 폐쇄적인 사나이(적도의 꽃, 1983)에서 지극히 몽상적인 남자(개그맨, 1989)로, 국가의 결정에 죽음으로 저항하는 군인(실미도, 2003)에서 위기 상황의 대통령(한반도, 2006)으로, 말 없는 킬러(인정사정 볼 것 없다)에서 퇴락한 건달(킬리만자로)로, 그의 캐릭터는 격렬하게 진동했다. 철없는 스타와 우정을 이어가는 매니저(라디오 스타, 2006), 기억을 잃어가는 딸을 바라보는 아버지(카시오페아, 2022), 신념을 꺾지 않는 피고인(부러진 화살, 2011) 등 안성기라는 배우가 창조한 캐릭터들의 인덱스는 끊임없이 이어지며, 이것은 곧 한국영화의 역사가 되었다. 스크린 밖에서도 안성기의 존재감은 여전했다. 그는 충무로가 힘들 때마다 생각나는 이름이었고, 후배들이 기댈 수 있는 어깨였다. 그리고 한국영화계가 필요로 할 때 그는 경중이나 크기를 따지지 않고 그 자리에 있었다.
안성기라는 배우를 처음 만났던 때가 떠오른다. 김성수 감독의 '무사'를 촬영하던 현장이었고, 2000년 12월 중국이었다. 세트로 지은 토성 안으로 들어섰을 때, 한국에서 온 기자들을 맞이한 건 추위를 막기 위해 피워 놓은 모닥불이었다. 그 옆에 배우 안성기가 앉아 있었다. 그는 기자들에게, 현장에서 자신의 가장 큰 임무는 이 불씨를 꺼트리지 않는 것이라며 웃었다. 그에게 촬영 현장, 충무로는, 한국영화계는 그런 곳이었다. 자신이 빛나지 않아도 그 온기를 유지하기 위해 항상 애써야 했던 곳. 하지만 그 위대한 헌신성의 배우는 영면에 들었고, 그 허전함은 한 동안 우리 곁에 있을 것 같다.
김형석(영화 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