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션 기업 (주)스페이스눌의 CEO이자 러시아 문학 박사인 김정아가 도스토옙스키의 4대 장편을 1인 완역한 데 이어, 10년 완역의 생생한 기록이자 독자를 위한 '도스토옙스키 입문서'인 『도스토옙스키 번역 일기』를 최근 출판사 샘터를 통해 펴냈다.『죄와 벌』, 『백치』, 『악령』,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등 도스토옙스키 4대 장편(출판사 지만지 출간)을 한 사람이 완역한 사례는 세계적으로도 드물며, 한국에서는 유일무이하다. 저자는 2008년부터 도스토옙스키 작품 약 20여 권을 번역해왔다.
이 책은 단순한 작품 해설이나 번역 후기가 아니다. 한 인간이 문학과 온몸으로 부딪치며 겪은 성장 서사에 가깝다. 번역이 어떻게 삶을 바꾸고, 고전이 어떻게 오늘의 언어로 되살아나는지를 웃음과 눈물이 교차하는 이야기로 독자에게 전한다.
저자는 '작가의 말'에서 "만약 이 책을 통해 단 한 사람이라도 '아, 도스토옙스키를 한번 읽어 볼까?' 이렇게 생각하게 된다면, 나는 성공한 것이다"라고 적고 있다.
김정아의 번역 철학은 우리 시대의 지성 이어령 선생과의 특별한 만남에서 중요한 전환점을 맞았다. 원문의 거친 결을 살릴 것인가, 독자의 읽기 편함을 우선할 것인가를 고민하던 저자에게 이어령 선생은 "독자가 읽기 쉬운 게 좋은 번역이지"라는 명쾌한 답을 건넸다.
그 말은 난해함을 덜어내되 깊이를 포기하지 않는 번역으로 이어졌다. 문학적 상징, 종교적 함의, 심리의 미세한 결까지 놓치지 않으면서도 물 흐르듯 읽히는 문장을 지향한 것이다. 저자는 이를 두고 "인간이 할 수 있는 가장 성실하고 충실한 번역"이라고 자부한다.
낮에는 패션 기업 CEO로, 새벽에는 도스토옙스키의 그림자로 살았던 저자는 자신의 삶을 '산문적 세계(비즈니스)'와 '시적 세계(문학)'의 병행이라 부른다. 1997년 IMF 외환위기 속 미국 유학 시절, 두 아이를 키우며 강의조교(TA) 일을 병행하던 생존의 최전선에서 그의 새벽 루틴은 시작됐다.
어려운 조건 속에서도 그는 매일 새벽 2시쯤 어김없이 책상 앞에 앉았다. 낮의 피로와 생존의 무게를, 고독하고도 치열하게 도스토옙스키와 마주하는 새벽의 환희로 견뎌 낸 것이다.
2025년, 4대 장편의 마지막 원고를 넘기며 마침표를 찍은 10년의 고독한 여정은 이 책에 고스란히 응축되어 있다. 『도스토옙스키 번역 일기』는 단순한 번역의 기록을 넘어, 문학과 삶이 어떻게 서로를 구원하는지를 보여 주는 장엄한 서사다.
저자 김정아는 서울대학교 노어노문학과 및 동 대학원에서 학사·석사 학위를 받았다. 이후 미국으로 건너가 일리노이대학교 어배너-섐페인(University of Illinois at Urbana-Champaign) 슬라브어문학부 대학원에서 석사·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박사 학위 논문은 〈도스토옙스키의 『죄와 벌』에 나타난 숫자 상징〉이다.
김정아는 독보적인 번역 공로를 인정받아 2026년 푸시킨 메달 최종 후보에 이름을 올렸다. 푸시킨 메달은 러시아 문화와 언어의 발전 및 보급에 기여한 인물에게 러시아 정부가 수여하는 권위 있는 상이다. 2025년 10월에는 한국인 최초로 러시아의 대표적 문화·외교 재단인 '루스키 미르(Russkiy Mir)' 제17차 총회에서 기조연설을 했다.
문호의 세계를 활자 위에서 온몸으로 통과해 온 저자의 여정은 실제 도스토옙스키의 삶의 현장으로도 이어지고 있다. 저자가 번역한 도스토옙스키 4대 장편 세트와 합본판은 주한 러시아대사관 로비에 전시되었으며, 러시아 현지에서도 주목을 받았다.
저자는 최근 '루스키 미르 재단'의 초청을 받아 도스토옙스키가 유형수로 끌려갔던 옴스크와 그의 사상 형성에 영향을 준 옵티나 수도원, 세묘노프스키 광장, 페트로파블롭스크 요새 등 문호의 삶의 흔적이 남아 있는 장소들을 직접 답사할 예정이다.
그는 도스토옙스키 연구에 뿌리를 둔 인문학적 시각을 바탕으로 패션·문화·비즈니스 영역에서도 활동 영역을 넓혀 왔다. 특히 콜롬비아와의 협력을 통해 양국 간 문화·경제 교류 사업을 추진한 공로를 인정받아, 2024년 콜롬비아 대사관으로부터 감사패와 공로상을 받았다.
■4대 장편, 네 개의 질문으로 다시 읽는 인간의 심연
▶ 제1장 『죄와 벌』 벼랑 끝에 선 인간
가난한 대학생 라스콜리니코프의 범죄를 통해 인간이 신념을 이루기 위해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 치밀하게 추적한다. 그가 왜 살인을 감행했는지, '초인 사상'과 '연민' 사이에서 갈등하는 한 인간의 내면을 섬세하게 탐구하며, 소냐의 숄과 대지에서 피어나는 '초록'이 상징하는 부활의 의미를 짚어 본다.
▶제2장 『백치』 너무 맑아서 부서진 사람
기사도 정신이 사라진 시대의 돈키호테인 미시킨 공작을 통해 '연민'이 인류의 존재 법칙임을 역설한다. 홀바인의 그림 「무덤 속의 그리스도」 앞에서 신앙이 흔들리는 서늘한 순간을 포착하고, 주인공을 둘러싼 '흰색'이 상징하는 순결함과 파멸의 이중성을 깊이 있게 파고든다.
▶제3장 『악령』 신을 잃은 자들의 광기
신의 영역을 두고 인간의 오만과 파괴적인 혁명의 광기를 깊이 있게 다룬다. 인신론과 신인론이 주는 묵직한 철학적 사유의 무게를 가늠하는 동시에, 번역 과정에서 겪은 '욕설 번역'의 고충 등 흥미로운 뒷이야기를 더해 작품의 입체적인 이해를 돕는다.
▶제4장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모든 심연을 껴안은 사람들
도스토옙스키의 생애 마지막 대작이자 유언과도 같은 이 작품이 던지는 자유와 연민의 질문을 마주한다. 침묵 속에 담긴 진정한 용서와 포용의 메시지를 해설하며, "4주간 울지 마세요."라는 안과 처방을 받은 일화, 공황 장애와 싸워 가며 '영혼의 합선'과도 같은 놀라운 경험을 한 일 등 번역가의 치열한 새벽을 생생하게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