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통상 분야에 세계무역기구(WTO)가 있는 것과 달리 국제금융 분야에는 그에 상응하는 국제기구, 예컨대 ‘세계금융기구’가 없다. 국제통화기금(IMF)과 세계은행은 회원국 통화와 재정정책에 초점을 맞추고 금융규제나 감독, 분쟁해결 기능은 없다. WTO와 비교하면 기능과 역할이 제한적이다. 2차대전 후 출범한 브레튼우즈체제는 통상에서는 개방적인 시스템을 지지했지만 금융에서는 원칙적으로 국제적인 자본이동의 제한과 보호주의를 지지했다. 전후 복구와 개발에 필요한 자금이동은 민간투자가 아닌 마샬플랜과 같은 공적 채널로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 당시 체제 설계자들의 생각이었다.
2008년의 글로벌 금융위기를 계기로 WTO에 상응하는 위상을 갖추고 효율적인 기능을 수행할 금융분야 국제기구 설립을 포함, 새 국제금융질서 도입이 논의되어 왔다. 금융위기 과정에서 위기는 급속히 국제적으로 전이되는 현상이 발생했으나 각국 정부는 그에 대응해 효과적으로 공조를 취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고 그 결과 위기의 수습은 순조롭지 못했다. 그래서 G20이 금융안정위원회(FSB)를 중심으로 작업을 진행하게 했고 이제 FSB는 WTO, IMF, 세계은행과 함께 제4의 국제경제기구로 불린다. 우리나라에서는 한국은행과 금융위원회가 멤버로 참여하고 있다. 2010년에는 FSB 총회가 서울에서 개최되기도 했다.
금융거래가 전 세계적으로 자유화되고 금융의 국제기구가 규제권한을 보유하게 된다고 해도 막상 금융위기가 발생한다면 그 파장은 고스란히 각국 정부가 국내적으로 감당해야 한다. 즉, 구제금융은 각국 정부와 개별 국가 납세자들의 몫이고 그로 인한 정치적 부담도 각국 정부의 집권세력이 지게 된다. 이러한 상황에서 자유무역이 가져다주는 것과 같은 효익을 금융의 자유화와 국제기구에 의한 금융규제가 가져다줄 것이라는 확신이 아직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앞으로 FSB를 중심으로 한 새 국제금융질서가 어떤 모양을 취할지 예측하기 어렵다.
그러나 상품과 달리 금융자산은 국제적 이동에 비용이 거의 들지 않고 전자화의 결과로 이동속도도 거의 실시간이다. 금융기관과 투자자들은 가장 규제가 약한 국가로 이동하여 거래하고 영업하며 투자한다. 이런 규제차익 시현행위가 과도해지면 그에 부응하기 위해 일부 국가가 금융규제와 감독을 완화하게 되는데 이는 다시 금융자산의 왜곡된 국제적 흐름을 일으키고 위험의 전이를 통해 국제적 차원의 시스템리스크를 발생시킨다. 국제적 금융규제는 이제 피할 수 없다. FSB는 금융규제와 감독에 관한 회원국들의 정책개발을 조율함으로써 글로벌 금융시장의 안정을 도모하는 것을 가장 큰 임무로 한다. 세계금융기구로 발전할 가능성도 꽤 높다.
FSB가 세계금융기구가 되는데 가장 필요한 것은 민주적 정당성이다. 피규제자들이 자신의 생활에 영향을 미칠 법규범의 정립과정에 의견을 반영할 수 있는 절차가 규범의 정당성을 담보하며 대의기관이 규범 제정에 관한 결정을 대신 내리는 경우 그 결과에 책임을 진다는 것이 민주주의 원칙이다. 이는 국제기구에도 마찬가지로 적용된다. 그래서 바젤위원회는 은행의 자본에 관한 새 규칙을 만들 때 전 세계 금융기관, 시민단체, 학자들로부터 수백 건의 의견을 접수해서 반영한다. IMF와 ADB는 미국과 일본이 독식하는 지배구조의 실패로 위력을 잃었다. 중국이 아시아인프라투자은행(AIIB) 창립회원을 최대한 유치하려고 애쓰는 것도 이 때문이다. 중국은 많은 지분을 가져도 지배구조에서 IMF와 ADB의 전철을 밟지 말아야 할 것이다.
한국의 AIIB 참가는 당연한 것이다. 지금은 2차대전 후 처음으로 국제금융질서가 새 판을 짜는 시기다. 서구의 학계에서 이에 대한 연구가 봇물을 이루는 것으로도 쉽게 알 수 있다. 어차피 우리가 주인공이 아니라면 모든 파티에 부지런히 참석해서 사람을 사귀고 목소리를 내며 정보를 수집해야 한다. 기구의 정당성 확립에 기여하고 그에 합당한 대우를 요구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