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중학교 동창 모임에서 난데없이 ‘노블레스 오블리주’(높은 신분의 도덕적 의무) 얘기가 나왔다. 힘 있는 자나 가진 자의 갑질, 성추행에 막말과 마약까지 이르는 ‘도덕 프리’에 허탈하다는 게 이들의 대체적인 평가였다.
‘롤 모델’이 없다는 결론에 다다를 때 즈음, 한 친구가 “꼭 그렇지는 않다”며 긴 얘기를 꺼냈다. 휘문고를 다닌 그는 정의선 현대차그룹 수석부회장과의 인연을 소개했다. 2학년과 3학년 2년 내내 함께 지냈다고 한다.
“당시 휘문고 다닌 학생 중 졸부 아들들이 많았는데, 한번은 호텔 사장 아들이 벤츠를 타고 등교해서 학교에서 난리가 난 적이 있었다.(지금은 상황이 달라졌지만) 그런데 (정 회장)은 단 한 번도 그런 티를 낸 적이 없었다.”
점심시간에 정 회장은 뒤로 돌아앉아 그 친구와 도시락을 까먹었다. 친구는 “맨날 도시락을 같이 먹는데도, (정 회장 도시락에) 특이한 반찬 하나 없었다”며 “내 도시락 반찬이 부실할 땐 더 열심히 먹었던 친구”라고 기억했다.
정 회장이 재벌가 손자라는 소식이 알려진 건 정주영 회장의 책에 실린 가족사진 때문이었다. 그 사실을 알게 된 또 다른 친구가 “아버지 덕 봐서 좋겠다”는 비아냥을 던질 때도 정 회장은 되레 “미안하다”고 사과했다고 한다.
“(정 회장의) 그런 모습을 계속보다 보니까, 재벌은 교육을 따로 받는 건가? 아니면 원래 인성이 그런가? 제법 헷갈리기 시작했다. 다른 사람을 불편하게 하거나 ‘내가 누구다’ 식의 티를 낸 적이 한 번도 없어 그게 더 이상했다.”
친구는 정 회장을 “선을 넘은 적이 없는 친구”라고 정의했다. 그 친구는 또 정 회장과 연락이 끊긴 지 오래됐지만, 어디서 그와 관련된 어떤 말이 들려오면 “분명 그렇게 말하고 행동했을 것”이라는 믿음이 있다고 했다.
그렇게 얘기하는 친구의 진정성에도 의구심은 사그라지지 않았다. 속을 드러내지 않는 ‘있는 자’의 꼼수나 거짓 배려 같은 속성을 쉽게 지울 수 없었기 때문. 속는 셈 치고 기업에 문외한 기자가 그간 있었던 ‘정 회장의 활동’을 추적해보니, 실제 많은 변화가 있었다.
올해 하반기에 내놓은 ‘파격’적인 그랜저는 ‘페이스리프트 수준’을 넘어섰고 자율 출퇴근·복장 자율화·점심시간 유연화 같은 일하는 방식까지 근본적 변화를 꾀했다. 정 회장은 최근 타운홀 미팅에서 “우리가 상상하지 못했던 변화를 만들 것”이라고 강조했는데, 실제 그렇게 될 것 같아서 놀라웠다.
‘회장’의 일방적 주문이 아닌, ‘직원’의 자발적 참여가 뜨겁게 이어졌을 것이라는 무의식적 믿음은 한결같은 그의 인품에서 나오는 듯했다. 어쩌면 당연하고도 자연스러운 가진 자의 ‘인품’ 얘기가 회자하는 건 씁쓸하면서도 반가운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