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다시 송년회의 계절이 왔다. 오랜만에 학창시절 동창생도 만나고, 함께 일했던 동료들과 과거를 회상하며 즐거운 시간을 보낸다. 이런 자리에는 마치 동영상이나 사진을 보고 있는 것과 같이 옛날 얘기를 완벽하게 재생하는 친구들이 한 두 명쯤 있다. 그들은 소위 '포토그래픽 메모리(완벽한 기억력)'를 뽐내며 분위기를 주도한다. 그러나 화기애애한 자리가 과거에 대한 기억의 차이로 논쟁을 벌이다 결국 불편한 상태로 끝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사람들은 매일 무언가를 경험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대부분의 경험 정보는 망각된다. 이 때문에 오늘 아침 출근길에 마주친 사람들의 얼굴도, 어제 만난 친구의 넥타이 색깔도, 그제 먹은 점심 메뉴도, 심지어 오늘 회의시간에 누가 무슨 말을 했는지조차 쉽게 잊는다.
기억력은 시간이 흐르면서 약해진다. 오래 전에 겪은 일은 내용이 잘 기억나지 않거나 다른 기억과 뒤섞여 뭐가 진짜인지 혼동되기도 한다. 그런데 통념과는 달리 바로 전에 일어난 일에 대해서도 거짓 기억이 형성될 수 있다는 연구결과가 나왔다. '단기 기억 착각'을 연구한 네덜란드 암스테르담대 심리학과 마르테 오텐 교수는 "자신이 잘 안다고 생각하거나 무언가를 기대하고 있었다면 불과 3초 전에 일어난 일도 잘못 기억할 수 있기 때문에, 아주 최근 기억도 완전히 신뢰할 수 없다"며 관련 내용을 국제과학학술지 '플로스 원(Plos One)'에 발표했다. 기억은 입력될 때 있는 그대로가 아니라 이전의 경험과 기대가 합쳐지면서 저장된다는 것이다.
미국 유니온칼리지 대학 심리학과 크리스토 차브리스 교수는 세계적 베스트 셀러 '보이지 않는 고릴라(원제: The Invisible Gorilla)'에서 사람들이 기억하고 있는 내용과 실제와의 차이를 '기억력 착각'이라는 용어로 설명하고 있다. 사람들의 기억은 진짜로 일어났던 일보다는 그것을 느끼는 감정에 좌우되며, 다른 사람의 경험도 마치 자신이 겪은 사건처럼 착각한다는 것이다. 또한 충격적이거나 중요한 사건에 대한 선명하고 상세한 기억일수록 착각이 가장 크게 작동되며, 사실과는 관계없이 사람들은 자신이 사건의 중심에 있다고 생각하는 성향이 강하기 때문에 착각이 빈번하게 일어난다고 했다. 그래서 중요한 회의에 참석하지 않았는데도 그 자리에 있었다고 믿고, 당연히 듣지도 말하지도 않았지만 자신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착각한다는 것이다.
경험과 기억 사이의 혼동은 강력한 인지적 착각 때문이다. 실제 경험과 기억은 왜곡되기가 쉬운데, 예를 들어, 월남전에 참전한 군인들을 대상으로 한 연구에 따르면 죄책감으로 인해, 전쟁에서 적군을 사살했다고 하는 숫자는 시간이 지날수록 적게 기억하고 있다는 것이다. 과거 실제 경험을 시간이 흐르면서 자신도 모르게 스스로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바꾸는 것이다. 또한 목격자들의 심리 가운데 '기억 동조'라는 것이 있다. 다른 목격자의 말을 듣고 나면, 자신이 직접 본 것으로 착각하는 효과를 말한다. 이렇듯 기억에는 수많은 요소들이 영향을 끼치며, 그로 인해 너무 쉽게 방해받거나 왜곡될 수 있다.
금년 초 세상을 떠난 미국의 저명한 인지심리학자 래리 자코비는 논문 '하룻밤 사이에 유명해지기(원제: Becoming Famous Overnight)'에서 가상의 낯선 이름을 자주 본 것만으로 그를 안다고 생각하고, 또 유명한 사람으로 착각하게 한다고 했다.
뉴질랜드 빅토리아대 심리학과 스테판 린드세이 교수는 기억이 얼마나 쉽게 조작되는 지에 대한 연구를 했다. 열기구를 타 본 경험이 없는 실험대상자들 몰래, 그들의 가족들에게 어린 시절 사진을 받아 열기구를 탔던 것처럼 보이게 사진을 조작했다. 그리고 그 사진을 보여주며 기억나는 것을 회상해보라고 하였다. 놀랍게도, 많은 사람들이 어렸을 때 열기구를 탔던 것이 생생하게 기억이 난다고 했으며, 심지어 조작된 사진에도 없던 내용까지도 상세하게 기억해냈다. 실험이 끝난 뒤 가짜 사진이라고 알려주었지만, 기억이 너무 생생해서 열기구를 탄 적 없다는 말이 오히려 거짓이라고 반응했다. 또한 유니버시티 칼리지 런던의 범죄심리학과 줄리아 쇼 교수는 그녀의 저서 '몹쓸 기억력 (원제: The memory illusion)'에서 우리가 확실하다고 여기는 기억이 얼마나 불완전하며 쉽게 조작될 수 있는 지를 강조했다.
몇 년 전 한 장의 드레스 사진이 인터넷과 소셜미디어를 뜨겁게 달구었다. 사람들이 드레스 색깔을 두고 치열하게 격돌한 것이다. 흰색 바탕에 금색 줄무늬 드레스, 즉 '흰금'이라는 주장과, 파란 바탕에 검정 줄무늬 드레스, 즉 '파검'이라는 주장이 팽팽하게 맞섰다. 놀랍게도 이 논쟁에 참여한 사람은 수 백만 명이 넘었으며, 테일러 스위프트나 줄리앤 무어와 같은 세계적인 탑스타들도 논쟁에 가세했다. 재밌는 것은 '흰금'으로 보는 사람들은 도대체 어떻게 이 드레스가 '파검'으로 보일 수 있는지 이해할 수 없었으며, 그 반대도 마찬가지였다. 가십을 다루는 주간지부터 내셔널 지오그래픽과 같은 과학 전문 잡지나 심지어는 뉴욕타임즈 같은 주요 미디어까지 이 기묘한 현상을 설명하려는 시도가 뒤따랐다. 이렇게 같은 것을 보면서도 완전히 다르게 보는 극단적 상황도 나타나고 있다. 그러나 현재까지도 '흰금파검'은 명확하게 정리되지 않고 미스터리로 남아있다.
그러나 세상에는 오히려 기억력이 너무 좋아서 괴로운 이들도 있다. '과잉기억증후군(Hyperthymesia)'을 가진 사람들이다. 2006년 처음 학계에 보고되었는데, 과거의 아무 날짜나 부르기만 하면 그날이 무슨 요일인지, 무엇을 했는지를 정확하게 기억해내는 놀라운 능력이 있다. 그러나 오히려 이 비범한 기억력으로 인해 고통을 호소하는 사람들이 많다.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TSD)'에 시달리는 것과 같이 항상 과거에 갇혀 있는 느낌이라는 것이다. 기억 연구의 전문가이며, 교황청 립히우그란지두술 가톨릭대 이반 이스쿠이에르두 교수는 그의 저서 '망각의 기술(원제: The Art of Forgetting)'에서 사람들이 '지우고 싶은 기억을 삭제하고, 중요한 사건, 아름다웠던 시절을 또렷이 기억하고 싶은 마음'은 인생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필요한 요소라고 하였다.
노벨경제학상을 수상한 다니엘 커너먼 교수는 인간에게는 경험자아(experiencing self)와 기억자아(remembering self)라는 두 존재가 공존하고 있다고 한다. 경험자아는 현재 내가 경험하는 것을 느끼는 것으로, 지금 벌어지는 기쁜 일이나 쾌락은 즐기고 고통이나 괴로움은 피하려 하고, 기억자아는 지나간 경험을 회상하고 평가하는데, 안타깝게도 이 두 자아는 대부분 일치하지 않는 다는 것이다. 커너먼 교수는 연구를 통해 인간의 뇌는 모든 경험을 있는 그대로 기억하지 않고 가장 강렬했던 순간(peak)과 가장 마지막 순간(end)에 의해 지배를 받는다는 것을 밝혀내고, 이를 '피크엔드 법칙(peak-end rule)'으로 명명했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신의 생생한 경험과 선명한 기억을 토대로 판단을 한다고 하지만 사실은 팩트와 상당히 큰 괴리가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한 해를 마무리하는 모처럼의 만남들이 모두의 좋은 추억이 되기를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