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계광장]바퀴벌레와 에포케

이병철 시인ㆍ단국대 문예창작과 교수
2025.09.10 02:05

이병철 문화평론가(시인).

최근 화제가 된 영상이 있다. 호주에서 워킹홀리데이를 하며 노동과 여행, 일상 등을 업로드해온 한 유튜버가 자신에게 쏟아진 폭력적 악플에 반박하는 콘텐츠다. 악플은 대개 이런 것들이다. "워홀(워킹홀리데이의 줄임말)하는 여자는 문란하다" "워홀 갔다온 여자는 일단 거른다" "호주에서 성매매한다" "결혼할 때 남편에게 워홀 다녀왔다는 거 숨기겠지" "워홀 경력 있으면 결혼정보회사에 가입 안 돼요" 등등 워홀에 대한 왜곡된 인식과 부정적 감정을 성희롱적 언사에 얹어 방기하는 식이다.

해당 유튜버는 건강하고 활달한 어투로 허위사실 유포 및 인신공격, 권리침해 성격의 악플마다 합리적이고 명쾌하게 응답했다. 어떤 말들은 너무나 지혜로워서 아름답게 느껴졌다. "자신이 비참하다고 해서 타인까지 자신의 비참한 수준으로 끌어내리려 하지 말라"는 일침이 인상적인 가운데 "사람은 자기 기준에서만 세상을 봐요. 해보지 않은 사람은 당연히 그 경험을 부정적으로 볼 수밖에 없어요. 새로운 도전을 할 때 꼭 주변의 시선이나 말에 휘둘리지 않았으면 좋겠어요"라는 마지막 멘트는 큰 울림을 줬다.

특이점 하나를 발견했다. 아예 대놓고 "나는 네가 싫다" 식의 혐오표현보다 "걱정돼서 하는 말인데"로 시작하는, 선의를 가장한 저주와 희롱이 더 많다는 것이다. 다른 소동 하나가 자연스레 떠올랐다. 가수 신지와 문원의 결혼 소식에 대중이 분노한 일이다. 과장 좀 보태 '온 국민이 뜯어말리는 결혼'이다. 다들 신지가 걱정된다며 예비남편의 과거 행적이 수상하다고, 관상이 나쁘다고, 언행이 가볍고 좀처럼 신뢰할 수 없어 보인다고 했다. 물론 일부 언행이 논란을 자초해 대중의 오해를 살 만하긴 했지만 한 사람이 살아온 삶 전체와 그를 선택한 신지의 안목, 그리고 두 사람이 함께 통과해온 시간들까지 다 부정될 만큼의 잘못인가 싶다.

어떤 사람들은 말을 할 때 듣는 사람을 신경 쓰지 않는다. 초등학교 때 배운 '청자를 고려한 말하기'에 불성실하다. 말하는 자기 자신에게만 집중하고 도취한다. 일종의 나르시시즘이다. 그들에게 말과 글은 타인과 소통의 수단이 아닌 자아도취의 도구다. '오, 내가 이토록 말을 잘하다니!' '나는 이런 말도 할 줄 아는 사람이야!' '내가 이렇게 똑똑하고 깨어 있다고!' '내 통찰력 대단하지?' 따위의 도파민 중독을 위해 말을 방뇨와 배변의 형식으로 그야말로 배설한다. 거기엔 '내가 그 결혼을 깨뜨릴 수 있다'거나 '워홀의 실체를 까발리겠다' 식의 졸렬하고 오만한 소영웅주의도 작용한다.

"다 너를 위해서"라든가 "공익을 위해서"로 포장된 언어폭력이 넘쳐난다. 그들은 상상한다. 호주 워홀러가 자신들의 왜곡된 성적 판타지 안에서처럼 문란하길 희망한다. 그리고 익명성 뒤에 숨어 그 더러운 상상을 현실에 부려놓는다. 자신들의 과대망상과 공동체로부터 승인받을 수 없는 일그러진 욕망, 확증편향 등을 화살촉 삼아 마녀사냥을 즐긴 후 이쯤 됐다 싶으면 관심을 끊는다. 자기 죄책감과 함께 대상을 폐기해버리는 사이코패스의 행태다. 이 비겁함은 일베, 에브리타임 등 익명 커뮤니티에서 온갖 종류의 사이버불링으로 나타난다. 익명성에 기대 어디서 주워듣거나 자신이 만들어낸 망상을 사실인 양 유포하고 특정인을 조롱, 모욕, 비방하다 법적 조치가 시작되면 처벌이 두려워 글을 지우면서 벌벌 떤다. 어둠 속에서 우글거리다 불이 켜진 순간 장롱 밑으로 기어들어가는 바퀴벌레들처럼.

그리스 회의론자들이 말한 '에포케'(epoche)는 '판단보류'를 뜻한다. 자기 지식과 경험은 불완전하므로 쉽게 판단하고 확언하는 태도를 경계해야 한다는 것이다. 말하고 싶은 욕망을 다스리는, 생각보다 앞서는 감정을 억누르는, 말의 목적이 무엇인지 고민해보는, 무분별한 혐오와 자의식 배설의 욕구를 참는 '에포케'가 우리에겐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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