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만 반도체 기업 TSMC의 일본 구마모토현 공장은 착공부터 완공까지 불과 1년 7개월이 걸렸다. 구마모토현은 신속한 행정 처리와 보조금 지급으로 뒷받침했고 지역 고등학교와 대학은 반도체 인재 양성을 위해 전용 학과를 신설하며 호응했다. TSMC와 거래하던 수십 개 협력사들도 공급망 효율성을 고려해 구마모토로 모여들고 있다.
삼성전자 반도체 공장이 들어설 미국 텍사스주 테일러시도 크게 다르지 않다. 시 정부는 토지·용수·전력 등 핵심 인프라를 선제적으로 확보하고 파격적 세제 혜택을 제시했다. 공장 가동에 대비해 인근 대학들과 함께 장·단기 반도체 인력 양성 프로그램을 준비 중이다.
두 사례의 공통점은 분명하다. 지역이 대형 선도기업, 이른바 앵커기업을 유치해 핵심 산업 역량을 확보하고 이를 중심으로 협력기업과 교육기관·연구소가 모이며 지역 고유의 산업 생태계를 형성하고 있다는 점이다. 기업 유치를 위해 필요한 유인책을 지방정부가 주도적으로 고민하고 실행에 나섰다는 점에서도 닮아있다.
지난달 산업통상부가 발표한 '산업 연구개발(R&D) 혁신방안'은 이러한 흐름 속에서 지역, 나아가 광역 단위 산업 생태계의 중요성에 주목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국가 산업 경쟁력이 탄탄하려면 국토 각 권역이 저마다 특색 있는 산업 생태계를 구축하고 공급망의 완결성을 갖추는 방향으로 발전해야 한다는 의식이 담겨 있다.
그동안 기업이 지역으로 이전해도 인력 수급 문제로 다시 수도권으로 회귀하는 사례가 적지 않았다. 때문에 수월성 중심의 연구·개발(R&D) 지원이 수도권 기업에 집중되는 경향이 있었다. 혁신방안의 핵심은 이런 한계를 넘어 지역에 의도적으로 R&D 투자를 확대하는 데 있다. 기업의 기술 수요와 투자 결정을 중심에 두고 지역의 인재·연구 인프라·실증 환경을 유기적으로 결집해 지역 주도 산업 생태계를 구축하겠다는 전략이다.
산업부 R&D 정책을 현장과 연결해 온 한국산업기술진흥원은 이러한 변화를 긍정적으로 평가한다. 지역 기업 R&D 활성화에 정책 자원이 집중되는 흐름은 산업 생태계의 균형 회복을 위한 중요한 전환점이 될 것이다.
지난 4일 대통령은 10대 기업 경영자들과의 간담회에서 "서울에서 거리가 멀수록 더 두텁게 지원하겠다"라고 밝힌 바 있다. 이에 기업들은 향후 5년간 270조 원 규모 지방 투자 계획을 제시했다. 대기업이 지역의 앵커기업으로 R&D를 이끌 때 파급 효과는 상당할 것이다. 다만 대기업이 없는 지역에서는 성장 잠재력을 지닌 중견기업이 그 역할을 대신할 수 있다. KIAT는 올해 중견기업 지원사업에 지역 기업 전용 트랙을 신설해 예산의 절반 이상을 지역 중견기업에 배정했다. 지역에 뿌리내린 중견기업이 앵커기업이 되어 지역 산업을 견인하는 선순환 구조를 만들기 위해서다.
대한민국 산업은 지금 도약과 도태의 갈림길에 서 있다. 글로벌 기술 패권 경쟁, 인공지능 전환, 통상 환경 변화 등은 산업 구조 전반에 변화를 요구하고 있다. 기존의 특정 업종, 수도권 중심의 연구개발 구조를 그대로 둔다면 산업 혁신은 공허한 구호에 그칠 위험이 크다. 정부가 내놓은 '산업 R&D 혁신방안'을 계기로 각 지역에서 개성과 경쟁력을 갖춘 산업 생태계가 활발히 조성되길 기대한다. 수도권 중심으로 촘촘히 그려졌던 대한민국의 산업 지도가, 국토를 더욱 넓게 쓰는 다극 체제로 재편되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