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유화학 산업, 아직 끝나지 않은 겨울[기고]

엄찬왕 한국화학산업협회 부회장
2026.02.23 05:40
엄찬왕 한국화학산업협회 부회장

지갑이 좀처럼 열리지 않는다. 지난 명절에도 치솟은 농수산물과 성수품 가격으로 차례상을 준비하며 한숨부터 내쉰 가정도 적지 않았을 것이다. 고물가는 좀처럼 꺾일 줄 모르고, 국민들이 느끼는 체감경기도 차갑기만 하다. 국가데이터포털 통계에 따르면 소매 판매는 4년째 감소세를 이어가며 최장 하락 기록을 새로 쓰고 있다. 계절은 봄을 향하고 있지만 여전히 한겨울 같이 느껴지는 이유다.

비단 가계에만 국한된 이야기가 아니다. 산업 현장 역시 급격히 상승한 비용 구조 속에서 비슷한 어려움을 겪고 있다. 특히 석유화학산업은 글로벌 공급과잉과 수요 둔화라는 구조적 위기에 더해 러·우 전쟁으로 러시아산 저가 납사 수입이 중단되고, 산업용 전기요금이 전례 없는 수준으로 인상되면서 원가 부담이 단기간에 급증했다.

24시간 설비를 연속 가동해야 하는 에너지 다소비 장치산업인 석유화학기업들에게 최근 3년간 무려 70% 이상 급증한 산업용 전기요금은 글로벌 시장에서 가격 경쟁력 약화로 직결되고 있다. 해외 주요국과 비교하더라도 우리나라 산업용 전기요금은 지난해 기준 ㎾h당 평균 180원대로 주요 경쟁국인 미국과 중국(약 110~120원) 대비 매우 과중하다.

문제는 이처럼 누적된 원가 부담과 경쟁력 약화가 개별 기업의 침체에만 그치지 않는다는 점이다. 석유화학산업은 국가 기반 산업이자 지역 경제를 떠받치는 핵심 축이다. 기업이 흔들리면 지역 상권, 주민들의 삶까지 고스란히 영향을 받게 된다. 명절 민생 물가 안정을 위해 정부가 농축산물 수급 점검과 할인 지원에 나서듯, 산업 현장의 원가 부담 역시 적극적으로 들여다봐야 하는 이유가 여기 있다.

물론 기업들이 손을 놓고 있는 것은 아니다. 지난해 주요 석화기업들은 업계 경쟁력 강화를 위해 사업재편 자율협약을 체결했고, 치열한 논의 끝에 여수·대산·울산 3대 산단 모두 사업재편안을 제출함으로써 NCC(납사분해설비)를 감축하기로 합의했다. 또 고부가 포트폴리오 전환 등 중장기적인 체질 개선에도 사활을 걸고 있다. 다만 기업들의 이러한 뼈를 깎는 자구 노력이 실질적인 성과로 이어지기 위해서는 당장의 경영 위기를 버틸 수 있는 최소한의 여건이 전제돼야 한다.

경쟁국들은 자국 산업 보호를 위해 선제적으로 발 빠르게 움직여 왔다. 중국은 지난해까지 화학산업의 기초 원료인 납사 소비세를 면제해 왔고, 정부 주도로 전력 직거래를 확대해 기업들의 전기요금 부담을 완화했다. 독일은 올해부터 전기요금 상한제를 도입해 기업들을 지원할 예정이라고 한다. 협회가 사업재편 기업들에 대한 금융·세제지원과 전기요금 부담 완화를 위한 전력산업 기반 기금 면제, 전기요금 체계 개편 등 지원책 마련에 목소리를 높이는 이유다.

지금 필요한 것은 특정 산업에 대한 특혜가 아니라 국가 기반 산업이 글로벌 경쟁력을 유지하며 지역과 함께 지속될 수 있도록 하는 합리적인 원가 부담 완화다. 기업이 살아야 지역이 살고, 지역이 살아야 국가 경제도 버틸 수 있다. 이 겨울을 넘겨 산업과 지역 모두에 봄이 깃들 수 있도록 산업 현장의 부담을 덜어줄 현실적인 정책 대안이 구체적으로 마련돼야 할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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