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데이 窓] 양자시대 승부처 '제조 역량'과 '첨단 패키징'

김형준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 차세대반도체연구소장
2026.03.29 09:00

[UFO 칼럼]

KIST 차세대반도체연구소 김형준 소장/사진=KIST

대한민국은 대만과 함께 세계 반도체 산업의 양대축을 이루고 있다. 특히 최근에는 AI(인공지능) 가속기의 핵심부품인 HBM(고대역폭메모리)을 사실상 독점 공급하며 글로벌 AI 산업을 견인하고 있다. 한국산 HBM은 유별나게 탁월하고 똑똑한 단일 칩이 아니다. 하루아침에 등장한 스타 제품도 아니다. 오랜 시간 축적해온 고도의 반도체 제조 역량에 더해, 고성능 칩을 아파트처럼 수직으로 적층하고 정밀하게 연결하는 첨단 패키징 기술이 결합된 성과다.

흥미로운 점은 이러한 제조 역량과 혁신기술의 결합 원리가 인류의 최첨단 과학으로 불리는 양자기술의 발전구조에서도 유사하게 나타나고 있다는 것이다. 지금까지 글로벌 양자기술 경쟁은 실험실에서 오류 없는 하나의 논리 큐비트를 구현하거나 소규모 시스템을 실증하는 데 집중돼 왔다. 하지만 현재 양자기술의 무대는 개별 소자의 성능 향상에서 거대한 시스템 통합으로 빠르게 이동하고 있다.

양자기술 역시 HBM처럼 단일 큐비트의 성능만으로는 구현되지 않는다. 여러 소자를 손실 없이 연결·집적·패키징하는 과정이 실용화의 관문이다. 현재 세계적인 양자기술 선도기업과 연구소들의 관심사 역시 최고 성능의 소자 개발을 넘어 극도로 예민한 부품들을 어떻게 손실 없이 연결하고 정교하게 패키징할 것인가로 옮겨가고 있다.

제조 역량과 패키징 기술의 결합은 양자기술이 연구실 수준을 벗어나 현실 세계로 확장되는 첫 걸음이자 궁극적으로 인류가 기대하는 거대하고 실용적인 양자 시스템을 완성하기 위해 반드시 넘어야 할 산이다. 흩어진 개별 기술들을 하나로 꿰어내는 시스템 통합이 양자기술의 다음 단계를 여는 열쇠가 되고 있다는 것이다.

최근 발표된 '제1차 양자 과학기술 및 양자산업 종합계획'도 이러한 흐름과 맞닿아 있다. 정부는 2035년 글로벌 양자경제 중심국가 도약과 양자칩 제조 세계 1위라는 담대한 목표를 제시하고 있다. 현재 미국, 유럽, 중국이 주도하는 양자기술 생태계는 설계, 파운드리, 패키징의 분업화 양상을 띠고 있다. 평화롭고 안정적인 글로벌 공급망 환경에서는 비용 면에서 꽤 효율적인 구조이다. 하지만 하루가 다르게 기술이 요동치는 전쟁터라면 이야기가 다르다. 핵심기술의 파편화와 특정 기술에 대한 높은 의존도는 즉각적인 피드백을 막고 혁신 속도를 떨어뜨리는 약점이 될 수 있다.

이 지점이 바로 양자기술 후발주자 대한민국이 파고들어야 할 빈틈이다. 반도체 산업에서 고도의 제조 역량과 첨단 패키징 기술을 동시에 내재화한 경험을 십분 살려야 한다. 기초실험부터 소재, 소자, 패키징, 시스템 통합, 최종 활용에 이르는 전주기 양자기술의 통합적인 밸류체인을 구축해야 한다. 이를 통해 현실 세계에 적용 가능한 분야를 조기에 발굴하고, 이를 지렛대 삼아 양자칩 제조 역량과 첨단 패키징 기술을 집중적으로 강화해야 한다.

최근 우리나라가 구축하고자 하는 광기반 양자팹은 이 같은 양자기술 통합의 중요성을 잘 보여주는 사례이다. 광기반 양자팹은 양자칩의 설계부터 제조까지 전주기 연구개발을 한 곳에서 수행할 수 있는 국내 최초의 양자칩 설계·제조 시설이다. 양자컴퓨터의 두뇌에 해당하는 양자칩은 크게 초전도 방식, 원자를 레이저로 제어하는 이온트랩 방식, 빛과 광자를 활용하는 광기반 방식으로 나눌 수 있다. 이중 광기반 양자 소자는 초전도나 이온트랩 방식과 달리 상온에서 작동 가능하다는 점이 큰 장점이다. 또 양자 통신망과의 뛰어난 연계성으로 미래 네트워크 기술에 최적화되어 있다는 점도 차별화 포인트이다.

물론 단점도 존재한다. 광원과 검출기 등의 다양한 소자를 작은 칩 위에 집적하고 정밀 제어해야 하는 만큼 제조 공정과 패키징 과정이 매우 까다롭다. 하지만 이런 복잡성이야말로 한국이 강점을 발휘할 수 있는 영역이다. 첨단 제조 역량과 패키징 기술의 융합, 그리고 내재화는 후발주자인 우리나라가 양자기술의 현실 적용과 시스템 구현에서 양자칩 기술의 선도국들보다 앞서나갈 수 있는 강력한 전략적 무기가 될 수 있다.

대한민국은 이미 반도체 산업을 통해 나노미터 단위의 미세 공정을 자유자재로 다루고, 복잡한 칩을 정교하게 패키징해 상용 시스템으로 구현할 수 있는 세계 최고 수준의 역량을 갖추고 있다. 아울러 기초연구 성과를 상용화로 이어갈 수 있는 탄탄한 인재풀도 존재한다. 이렇게 수많은 부품과 기술, 인력과 노하우가 한 치의 오차 없이 맞물려 돌아가는 극한의 시스템 엔지니어링을 통해 AI 시대의 가속기 HBM이 탄생했다.

양자기술 역시 고도의 제조 역량과 첨단 패키징이 한 그릇에 담길 때 비로소 세상을 혁신하는 힘을 갖게 된다. HBM처럼 다시 한 번 세상의 패러다임을 바꾸게 될 양자시대의 가속기 양자칩 역시 우리 땅에서, 우리 힘으로 완성해 나갈 수 있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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