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계광장]싸움의 바다, '마레 벨리(Mare Belli)'가 온다

구민교 서울대학교 행정대학원 교수
2026.05.06 02:00

세계는 열린 바다에서 닫힌 바다로 회귀
수출로 성장한 한국,바닷길 중요성 망각
바다 지킨 이순신 장군 '칼의 정신' 필요

포르투갈 리스본의 테주강이 대서양 품에 안기는 벨렝 지구에는 범선 돛 모양의 거대한 '발견 기념비'가 서 있다. 뱃머리에는 15세기 초 해양 강국 포르투갈의 설계자 엔히크 왕자를 필두로, 희망봉을 돌아 인도 항로를 개척한 바스쿠 다 가마와 최초로 세계 일주를 감행한 마젤란 등이 대항해 시대의 파도를 가르듯 조각되어 있다. 이 기념비는 이베리아반도의 작은 나라 포르투갈이 써 내려간 근대 해양 패권 경쟁의 서막을 알리는 이정표다.

과거의 바다는 사투의 현장인 동시에 미지를 향한 낭만이 교차하던 곳이었다. 식민지 수탈이라는 어두운 그림자에도 불구하고, '탐험'이라는 시대정신이 바다를 지배했다. 세월이 흘러 교역 품목은 비단과 향료에서 원유와 반도체로 바뀌었으나, 바다가 생존의 최전선이라는 본질은 변하지 않았다. 다만 21세기에 이르러 탐험의 낭만은 자취를 감추고, 라틴어 표현대로 싸움의 바다, 즉 '마레 벨리(Mare Belli)'만 남았다. '권(權)'과 '상(商)'을 장악하기 위한 현대판 '무(武)'의 전쟁이 시작된 것이다.

오늘날 바다는 수면 위아래를 가리지 않고 유무형의 칼날이 맞부딪히는 복합 전장이다. 해상교통로에 대한 일방적 통제는 군사적 선전포고와 다름없다. 군함 간의 직접 충돌뿐 아니라, 해상민병대와 부유(浮遊)식 구조물이 '회색지대' 갈등을 빚고 수중 드론과 해저케이블이 핵심 안보 자산으로 부상했다.

호르무즈 해협과 홍해는 그 단적인 사례다. 최근 중동의 긴장은 적대국 간 물리적 봉쇄를 넘어 '그림자 전쟁(shadow war)'의 양상까지 띤다. 예멘 후티 반군의 공격과 이란의 위협 속에 선사들은 막대한 비용을 감수하며 희망봉 우회 항로를 택한다. 바야흐로 '열린 바다(Mare Liberum)'에서 '닫힌 바다(Mare Clausum)'로의 회귀가 뚜렷해지는 형국이다.

인도-태평양 지역의 상황은 더욱 엄중하다. 남중국해에 설치된 중국의 '부유식 장벽'과 은밀한 수중 모니터링 장치는 해양력의 척도가 바다 위와 아래를 동시에 장악하는 '입체적 통제력'의 선점에 있음을 말해준다. 여기에 국가 존립의 기반인 해저케이블 안보까지 결부되면서, 바다는 단순한 항로나 자원의 보고를 넘어 초국가적 연결성의 사활이 걸린 각축장으로 탈바꿈했다.

우리 앞바다도 예외는 아니다. 해상을 통한 북한의 상시적 위협은 물론, 서해 잠정조치수역에 중국이 일방적으로 설치한 인공 구조물, 그리고 2028년 종료 시한이 다가오는 한일 대륙붕 공동개발 협정 등 비전통 안보 이슈의 무게가 그 어느 때보다 무겁다.

김훈의 소설 『칼의 노래』에는 이런 대목이 나온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칼은 권세와 이윤을 아울러 천하를 도모하는 칼이었다. […] 히데요시의 칼은 일본 남쪽에 항구를 열어서 천하의 이윤이 기다리고 있는 구라파와 안남의 또 다른 항구들을 겨누고 있었다." 바다가 낭만의 공간이 아니라 '권'과 '상'을 잇는 통로이자 생존의 장이라는 사실을, 16세기 중반 포르투갈 상인을 통해 화승총을 처음 접했던 일본 무사들은 이미 간파하고 있었다.

우리나라는 20세기 중반 이후 바닷길을 통해 기적적인 경제 성장을 일궈냈음에도 불구하고, 해양 안보에 대한 인식은 여전히 안일한 수준에 머물러 있다. 남들이 구축한 해양 질서에 무임승차해 온 관성만으로는 '마레 벨리' 시대의 거센 파도를 넘을 수 없다.

별의 길을 읽기 위해 혼천의(渾天儀)를 국기에 새긴 포르투갈의 열정과, 화승총의 일본식 개량판인 조총(鳥銃)을 앞세운 침략에 맞서 우리 바다를 결연히 지켜낸 이순신 장군의 '칼의 정신'을 되새겨야 할 때다. "바다를 지배하는 자가 무역을, 무역을 지배하는 자가 세계의 부와 세계 그 자체를 지배한다"는 격언은, 스스로 바다를 지킬 의지와 능력이 없는 국가에게 바다는 미래를 허락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일깨워 준다.

구민교 서울대학교 행정대학원 교수

<저작권자 © ‘돈이 보이는 리얼타임 뉴스’ 머니투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AI학습 이용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