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數)싸움'이 진짜 '수(手)싸움'으로 확전했다.
내년 이후 한국이 부담할 방위비 분담금을 결정하는 한미 협상 얘기다. 트럼프 행정부가 협상 결렬 몇 시간 만에 '주한미군 감축·철수' 여지를 남기는 최대한의 압박에 나섰다. 22일 자정 한일 군사정보보호협정(GSOMIA·지소미아) 종료와 방위비 분담금 협상 등 민감한 이슈가 즐비한 상황에서다. 압박 강도를 끌어올리기 위해 동원 가능한 모든 지렛대를 활용하려는 것이란 분석이 나온다.
블룸버그 통신 등 외신에 따르면, 필리핀을 방문 중인 마크 에스퍼 미국 국방부 장관은 19일(현지시간) 필리핀 국방장관과 공동 기자회견에서 한미 방위비 협상과 관련한 주한미군 감축 가능성을 묻는 질문에 "예측하거나 추측하지 않겠다"고 답했다. 19일 서울에서 열린 한미 방위비 협상이 90분 만에 파행한 직후 나온 발언이다.
지난 13일(현지시간) 방한길에 오를 당시 "지금은 (주한미군 감축을) 생각하지 않는다"고 한 발언과는 수위가 다르다. 우리측 수석대표인 정은보 방위비 협상대사는 전날 회견에서 "(주한미군 문제는 협상 과정에서) 한 번도 논의된 바 없다"고 했다. 이번엔 불확실성을 키우는 애매한 답변으로 상황 변화에 따라 주한미군을 줄이거나 뺄 수 있다는 점을 시사한 것이다. 에스퍼 장관은 "한국은 부유한 나라다. 그들은 더 많이 기여할 수 있고 기여해야 한다"며 방위비 분담금 대폭 증액을 거듭 압박했다.
이번 협상은 주한미군 주둔 비용 분담금을 결정하는 숫자 싸움이다. 그런데 트럼프 대통령의 내년 재선 도전과 한미일 안보협력의 상징인 한일 지소미아 종료 등과 맞물려 방위비 협상이 한미가 수(手)를 겨루는 전략 싸움으로 바뀌는 형국이다. 주한미군 감축·철수 가능성까지 시사한 미국의 전방위 압박이 이어지면서다.
미 조야와 외교가에선 동맹국의 방위비 분담 증액이 트럼프 대통령의 최대 관심사안 중 하나란 분석이 많다. 분담금 증액은 트럼프 대통령의 대선 공약이기도 하다. 미국의 재정부담을 줄이는 대선공약 이행은 내년 재선 도전 과정에서 활용할 수 있는 대표적인 카드로도 꼽힌다.
트럼프 대통령은 대외 정책에서도 뚜렷한 성과가 없다. 북한 비핵화는 답보 상태고, 중국과 무역전쟁도 해결 기미가 없다. 한국과 일본, 독일, 나토(북대서양조약기구) 등 동맹국의 방위비 분담 증액을 '외교적 치적'으로 삼으려 할 유인이 크다는 얘기다. 미국 외교·안보 고위 당국자들이 연일 압박 강도를 최고조로 끌어올리고 있는 배경이다. 방위비 협상 도중 전례없이 '중단'을 선언하고 90분 만에 협상장을 떠난 제임스 드하트 미 협상대표의 돌출 행동도 같은 맥락에서 읽힌다.
주한미군은 중국을 견제해 동북아시아 역내 안보 패권을 지키려는 미국의 전략적 이익과 직결돼 있다. 북한 비핵화도 여전히 갈 길이 멀다. 따라서 감축·철수가 현실화할 가능성은 크지 않아 보인다. 다만 주한미군이 한반도 안보의 핵심 축인 만큼 미국이 협상의 지렛대로 적극 활용하려 할 수 있다. 에스퍼 장관의 주한미군 관련 언급이 지소미아와 방위비 문제로 불편한 한국 정부를 효과적으로 압박하려는 전략적 발언이란 분석이 나오는 배경이다.
정욱식 평화네트워크 대표는 20일 제11차 한미 방위비분담 특별협정(SMA) 대응방안 국회 토론회에서 "지난 2016년 당시 트럼프 대통령의 공약은 동맹국에 돈을 다 받아내거나, 여의치 않을 땐 (미군을) 빼겠다는 것 두 가지였다"며 "내년 재선을 앞두고 어떤 형태로든 둘 중 하나가 이뤄지고 있다는 걸 보여주려고 할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