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쪄서 그래" 걷기·달리기, 계단 오르기가 힘들어지고 말할 때 숨이 가쁘면 주변에서 '살' 때문이라는 말을 흔히 듣는다. 체중 감량을 위해 다이어트에 돌입하지만, 열심히 살을 빼고 체력을 길렀는데도 여전히 숨이 차고 운동하기 힘들다면 한 번쯤 '병원'을 찾을 필요가 있다. 체중 문제가 아닌 심장이 고장 나는 유전성 심장병, '비대성 심근병증'이 원인일 수 있기 때문이다.
오는 26일은 '비대성 심근병증 인식의 날'(HCM Awareness Day)이다. 비대성 심근병증은 심장 근육이 특별한 원인 없이 과도하게 커지는 병이다. 근육이 크고 단단해지는 것은 '건강의 상징'처럼 여겨지지만, 심장만큼은 예외다. 심장 근육이 두꺼워지면 혈액이 순환되는 내부 공간이 좁아지면서 대동맥 통로 등을 막아 심장의 기능과 구조에 심각한 문제를 초래하고, 끝내는 사망에 이를 수 있다.
비대성 심근병증의 증상은 환자마다 다르고 발현 시기도 천차만별이다. 가장 흔한 증상은 호흡곤란으로 전체 환자의 약 90%가 경험하는 것으로 보고된다. 이 밖에도 △흉통 △심장 두근거림 △실신 등을 겪을 수 있다. 심한 경우 계단을 오르거나 조금만 빠른 속도로 움직여도 숨이 차거나 가슴 통증이 느껴져 정상적인 생활이 어려울 수 있다. 심지어 쉬는 시간에도 호흡곤란을 겪거나 수면 장애가 나타나 환자들의 삶의 질이 크게 떨어진다.
비대성 심근병증이 위험한 건 가장 처음 나타나는 증상이 '심장 돌연사' 일수 있기 때문이다. 병을 인지하지 못할 때 경쟁적인 팀 스포츠나 강도 높은 운동을 하다 쓰러지는 경우가 실제로 적지 않다고 한다. 조익성 세브란스병원 심장내과 교수는 "최근 비대성 심근병증 환자도 운동이 가능하다는 일부 연구 결과나 의견들이 나오지만, 질환 특성상 심실성 부정맥이 발생할 가능성이 높아 운동 중 돌연사 위험을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다"며 "미리 돌연사 위험을 평가하고 주치의와 운동 강도와 종류를 상의하지 않으면 위험한 상황에 빠질 수 있다"고 경고했다.
비대성 심근병증으로 인한 돌연사는 30대 이하 '젊은 환자'를 노린다. 미국에서 진행된 연구에 따르면 20대 비대성 심근병증 환자의 사망 위험이 동일 연령대의 일반 인구보다 4배 이상 높은 것으로 보고됐다. 문제는 젊은 층은 건강을 자신하다 보니 스스로 심장에 문제가 있는지 자각하기 어렵다는 점이다. 조 교수는 "심초음파 검사로 비교적 쉽게 비대성 심근병증을 진단할 수 있음에도 많은 환자가 증상이 심해지고 나서야 뒤늦게 병원을 찾는다"고 안타까워했다.
건강보험심사평가원에 따르면 2023년 국내 비대성 심근병증 진단 환자는 2만2000여명으로 2018년보다 40% 가까이 증가했다. 그런데도 전문가들은 이보다 환자 규모가 훨씬 더 클 것이라 판단한다. 조익성 교수는 "비대성 심근병증 유병률을 고려하면 국내 전체 비대성 심근병증 환자 수는 최대 20만 명에 이를 것으로 추산된다"며 "그러나 이 중 실제로 진단받은 환자는 10~15%에 불과한 실정"이라 지적했다.
비대성 심근병증은 신체검사와 심전도 및 심(장)초음파 검사로 진단할 수 있다. 정확한 질병 상태를 알기 위해 심장 MRI 검사를 진행하기도 한다. 이 중에서도 심초음파 검사는 심장의 크기와 기능 그리고 두꺼워진 심장 근육의 두께를 보다 정확하게 확인할 수 있어 비대성 심근병증의 진단과 치료 방침을 결정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건강검진 시 신청하면 쉽게 받을 수 있고, 2021년부터는 의학적 판단에 따라 심장 질환이 있거나 의심되는 경우, 또는 경과 관찰이 필요한 경우 건강보험 급여 적용을 받을 수 있게 돼 경제적 부담도 줄었다.
비대성 심근병증은 유전성 심혈관 질환으로 약 450가지 이상의 심장 근육 단백질의 변이가 발병에 관여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유전 확률은 50%로 실제 비대성 심근병증 진단을 받은 소아 환자의 50~60%에서 가족력이 확인된다. 즉, 가족 중 한명이 비대성 심근병증이라면 환자의 부모, 형제자매, 자녀와 같은 1차 친족도 심전도·심초음파 검사를 받을 필요가 있다. 글로벌 진료 가이드라인에서도 이런 '가족 검사'를 권장한다.
과거 폐색성 비대성 심근병증은 치료법이 제한적이었지만, 최근 비대성 심근병증만을 표적 하는 최초의 먹는(경구용) 신약 '마바캄텐'(제품명 캄지오스)가 나오면서 환자의 치료 선택지가 보다 확대됐다. 좌심실 유출로가 협착된 폐색성 비대성 심근병증 환자 중 증상이 다소 심각(NYHA 2~3등급)하다면 건강보험 적용을 받을 수 있다. 관련 임상 결과, 마비캄텐은 증상의 정도(NYHA 등급)와 운동 능력(pVO2)을 위약(가짜 약) 대비 모두 유의미하게 개선한 것으로 나타났다. 3년 이상 장기 치료에서도 효과와 안전성이 안정적으로 유지됐다.
조익성 교수는 "비대성 심근병증은 어느 연령대에서나 증상이 나타날 수 있어 조기 진단 후 꾸준한 관리가 매우 중요하다"며 "최근 등장한 신약으로 일상 회복의 가능성이 커진 만큼 호흡곤란, 흉통 등 의심 증상이 있다면 가볍게 여기지 말고 적극적으로 심초음파 검사를 통해 심장 상태를 점검해보길 권한다"고 조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