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ㆍ홍보맨' 두인생 사는 윤성학 농심과장

'시인ㆍ홍보맨' 두인생 사는 윤성학 농심과장

지영호 기자
2009.06.03 12:17

[머니위크]

"간혹 회사 앞 식당에서 벌어지는 ‘신발 주인 논쟁’에서 당신은 구두의 주름이 나를 말해주지 못하는 아쉬움을 느껴본 적이 있는가?"

촉촉한 봄비가 내리던 날 만난 이 남자는 ‘시인과 생활인’이라는 두개의 정체성을 이렇게 풀어냈다.

윤성학농심(394,500원 ▼2,500 -0.63%)홍보팀 과장은 샐러리맨이자 시인이다. 명함에 적힌 그의 직업인 홍보 는 말 그대로 전쟁이다. 입사 13년차임에도 양손에 전화기를 들고 보도자료를 준비하는 일이 허다하다. 장시간 기획회의와 밤늦은 술자리까지 감당하면 여지없이 파김치가 되곤 한다.

그런 그에게 순간순간 다른 삶의 기회가 있다. 출근하는 차안에서, 출장길 버스에서, 토막 같은 식사시간에, 심지어 바쁜 일과 중에 남들이 보지 못하는 새로운 것을 발견해 낸다. 시는 부슬비가 내리는 날 대청마루에 소반을 펴야 나오는 것쯤으로 생각했던 기자에게 적당한 펀치를 날린다.

“업무 중 좋은 시상이 떠오를 때는 컴퓨터에 몰래 새 창을 띄워 시를 쓰기도 해요.”

윤 과장은 중앙대학교 문예창작과에 입학할 때만 해도 그저 마음 좋은 국어선생님이 되고 싶었다. 학내 글짓기대회에서 수상한 이후 시를 쓰는 재능을 알게 됐다. 이후 시인의 꿈을 이루기 위해 10여년간 언론사 신춘문예에 응모했지만 결과는 번번이 낙방이었다.

“강남 운전면허시험장에 가면 ‘한번 낙방 두번 낙방 늘어가는 운전실력’이라는 글귀가 있어요. 제가 딱 그런 케이스였어요.”

150여편의 시를 응모한 끝에 2002년 문화일보 신춘문예를 통해 등단했다. 그동안 실패를 거듭하면서 쌓인 내공이 그의 시를 한단계 격상시킨 것이다.

하지만 스포트라이트를 기대했던 등단이 허무하다는 것을 알게 됐을 때 슬럼프가 찾아왔다. 1년 동안 겨우 시 3편 쓴 게 전부였던 시기도 있었다.

“천형(天刑)이라고 하죠. 하늘이 내린 형벌. 문학을 하는 사람들은 모두 창작의 고통에 시달린다고 해서 생긴 말입니다. 저도 예외가 아니었죠.”

2006년 홍역 끝에 그는 그동안의 작품을 엄선해 첫 시집을 출간했다. 그의 시집 제목이기도 한 <당랑권 전성시대>는 시인의 눈으로 보는 생활인의 모습을 담아낸 작품이다.

그는 시에서 사회생활을 하다보면 주변인들과 적당한 거리를 두며 엮이려 하지 않다가도 자신에게 피해가 온다 싶으면 강하게 공격하는 부류의 사람들을 고수라 칭했다. 그리고 고수가 하는 행동이 흡사 당랑권과 비슷하다고 했다. <당랑권 전성시대>는 그런 이 세대의 모습을 풍자한 시다.

윤 과장은 ‘남들이 갖지 않은 시각’을 ‘시인의 눈’이라고 설명했다. 예컨대 ‘바람에 흔들리는 미류나무’를 보면서 ‘미류나무 빗자루가 하늘을 쓸고 있다’고 보는 시각이다. 다만 생활인에 치우치다보면 시인의 시력이 점점 약해진다며 경계했다.

그렇다고 생활을 소홀히 할 수는 없다. 그는 ‘회사 내에서 목소리가 반영되는 위치까지 올라가는 것’을 ‘좋은 시인으로 기억되는 것’과 함께 인생의 목표로 삼고 있다.

최근 추가된 홍보기획 업무도 열심이다. 사내에서 꽤 괜찮은 프로젝트가 자신의 손에서 나왔다며 흡족해 한다. 양쪽 모두 창작을 필요로 하는 일이다 보니 예전보다 시를 쓰는 여유가 없어졌지만 항상 가장 바빴을 때 좋은 작품이 나왔다며 오히려 즐기는 투다.

그는 내년쯤 그동안 시인과 생활인의 정체성 사이에서 발견한 세상을 다시 한번 독자에게 전달할 계획이다. 틈틈이 작품 준비를 하고 있다는 윤 과장이 아직 공개하지 않은 작품 중에서 시인이자 생활인인 윤성학의 목소리를 들어보자. 그가 버스를 타고 가다 우연히 본 중장비를 보고 쓴 <포크레인이다>란 시다.

못된 것만 배웠구나

널 그렇게 가르친 적 없다

모두 다 가지고 싶어서

아귀아귀

손아귀로 죄 긁어모으는 걸로만 보였느냐

남의 속까지 다 긁어다

네 앞에 쌓아놓고 살면 살만 하더냐

그럼 하나만 물어본다

내가 늘 주먹들고 다니는 건

왜 안 보았느냐

너, 언제부터 주먹쥐지 않고도

그렇게 잘 살고 있는지

기억하고 있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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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영호 산업2부장

'두려울수록 맞서라' 처음 다짐을 잊지 않는 기자를 꿈꿉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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