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보드워리어 '현피'도 모자라 '현살'까지 간 이유

키보드워리어 '현피'도 모자라 '현살'까지 간 이유

최우영 기자
2013.07.19 07:00

전문가들 "온라인의 왜곡된 규범과 현실을 구분하는 능력 부족"

한 청년 무직자가 한번도 만난 적 없는 동갑내기 여성을 전남 광주에서 부산까지 260㎞를 달려가 흉기로 끔찍하게 난자했다. 온라인 게시판에서 벌어진 갈등이 현실의 살인으로 이어진 어이없는 비극이었다.

극심해진 청년실업으로 사회 생활 기회를 빼앗기고, 바깥 세상과의 정상적인 소통에 실패하자 급기야 온라인 '지하방'에 갇혀 지낸 30대 남성이 저지른 참극이었다. 극단적 표현이 난무하는 온라인에서 횡행하는 폭력이 현실로 나타나는 데 '브레이크'는 없었다.

◇성적 비하부터 고소협박, 살인까지… 정사갤에 무슨 일이?

2011년 디씨인사이드 정치사회갤러리(정사갤)에서 알게 된 백모씨(30·무직)와 김모씨(30·여·무직). 김씨는 정사갤에서 자신의 얼굴과 몸매 인증사진을 올리고 진보진영을 비판하는 글도 곧잘 올려 유명세를 타고 있었다.

백씨(필명:자중하는ㅇㅇ)는 김씨(필명:비제)에게 사과문을 올리면서도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의 유서 형식을 빌어 희화화했다. /사진=인터넷 캡처
백씨(필명:자중하는ㅇㅇ)는 김씨(필명:비제)에게 사과문을 올리면서도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의 유서 형식을 빌어 희화화했다. /사진=인터넷 캡처

백씨는 김씨와 친해지기 위해 말을 걸면서 김씨를 여성 성기를 지칭하는 용어 등으로 불렀다. 다른 게시판 사용자들까지 가세하자 김씨는 고소장을 작성해 인증사진을 게시판에 올렸다. 백씨가 사죄의 뜻을 밝혔으나 정사갤에서 희화화되던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의 유서 형식을 빌어 장난스럽게 썼다.

김씨가 고소 강행의사를 밝히자 백씨는 재차 사죄하기 위해 김씨가 사는 부산 해운대경찰서 앞에서 사진을 찍어 게시판에 올리며 "사과하려고 부산까지 왔다"고 했다. 김씨는 "내가 사는 동네까지 오니까 더 소름끼친다"며 고소 취하의사가 없음을 분명히 했다.

결국 백씨는 지난 4월부터 '신상털이'로 알아낸 김씨 얼굴과 집주소등을 게시판에 올리다 지난 5일 부산으로 떠났다. 2차례 현장답사를 마친 뒤 지난 10일 밤 집에서 나오는 김씨에게 이름을 물어본 뒤 흉기로 온몸을 9차례 찔렀다. 김씨는 숨졌다.

◇온라인 갈등에 현실 칼부림, '현실 검증력 부족'

온라인 싸움이 오프라인까지 이어진 '현피'는 종종 있어왔지만 살인까지 이어진 경우는 처음이다. 대부분 인터넷에서 활발한 활동을 벌이는 이들은 '키보드워리어'다. 키보드 앞에서는 '전사'가 되지만 막상 현실에서는 온라인만큼 활발한 활동을 보이지 못하는 것.

이수정 경기대 범죄심리학과 교수는 "정신질환이 의심된다"는 소견을 밝혔다. 이 교수는 "청소년들은 온오프라인 구분하기 어려운 미성숙함 때문에 '현피'에 나서는 경우가 많지만 성인이 과도한 폭력을 행사할 때는 특별한 동기가 필요하다"면서 "틀림없이 검거돼 처벌받을 것 알면서 그런 행동(살인)을 했다는 것은 잦은 인터넷활동으로 인한 '은둔형 외톨이' 문제 등이 작용했을 것"이라고 분석했다.

백씨는 지난해부터 1년 동안 정사갤에 740여개의 글을 올리고 2100여개의 댓글을 달았다. 아이디를 로그인하지 않은 상태에서 단 글과 댓글이 훨씬 많다. 백씨의 잦은 인터넷 생활로 인해 현실 검증력이 떨어졌다는 진단도 나왔다.

이동귀 연세대 심리학과 교수는 "자신만의 공상을 현실로 옮기지 않는 '현실 검증력'이 떨어지는 사람 같다"고 백씨를 분석했다.

이 교수는 "온라인에서의 감정과 현실 감정이 서로 분화가 안되고 영향을 주는 사람은 정신적으로 건강하지 않다"면서 "규칙적인 직업이 없어 인터넷에 과다노출된 점, 현실에서 위축되고 고립되고 직장도 없어 생긴 '욕구불만'을 온라인에 풀면서 '자존감'을 찾으려 했던 점" 등을 백씨의 특징으로 지목했다.

그는 "누군가 자신을 무시할 때, 자아가 취약하고 마음이 심하게 고립된 사람은 자해나 자살을 하지만 자아가 취약하면서 에너지가 좀 있는 사람은 바깥으로 분노가 향하게 되면 '묻지마 범죄'가 된다"면서 "온라인공간에서의 언어폭력이 물리적 폭력 이상으로 타격을 줄 수 있어 백씨에게 영향을 끼친 것 같다"고 덧붙였다.

◇소통의 기회 빼앗은 '청년실업사회'에도 일부 책임

백씨 등 온라인 갈등을 오프라인으로 그대로 끌고 오는 젊은층의 범죄가 '청년실업'에 기인했다는 분석도 나왔다.

전우영 충남대 심리학과 교수는 "직장을 갖는다는 건 돈 벌 수 있는 기회만이 아닌 공식적으로 다른 사람과 상호작용하는 기회를 주는 것"이라면서 "그런 기회를 박탈 당한 상태에서 백씨가 주로 온라인에서 극단적인 느낌을 표현하는 이들과 어울리면서 그걸 현실이라고 생각해 현실 검증력을 갖출 수 없었던 것"이라고 바라봤다.

전 교수는 "우리 사회가 청년들에게 사회적 소통, 현실규범 습득 기회를 제대로 제공해주지 못하면 눈에 보이는 실업문제만이 아닌 이번 사건과 같은 사회적 부작용까지 만들 수 있다"고 진단했다. 그는 이어 "인터넷에 몰두해 왜곡된 규칙을 가진 백씨 같은 이들은 '내게 이런 모욕을 준 사람은 이 정도 공격을 받는 게 정당하다'는 잘못된 생각을 해도 주변에 교정해줄 사람이 없다"며 안타까워했다.

일간베스트 저장소(일베) 등 사이트가 대다수 젊은이들의 현실 검증력을 저하시킬 것이란 우려도 제기됐다.

전 교수는 "과거에는 자신만의 잘못된 생각을 밖으로 표출하지 않고 혼자 삭였지만 이제는 온라인 사이트에서 똑같은 생각하는 사람이 많이 보이면 그것을 '다수의 의견'으로 착각할 수 있다"며 "그러한 온라인 규범을 현실로 가져오게 되면 점점 끔찍한 사건 발생이 늘어날 것"이라고 진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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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산업부 유니콘팩토리에서 벤처스타트업 생태계를 취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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