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니바이크 에세이] 윤일석의 자전거이야기

고등학생 시절만 해도 자동차에 관심이 많았던 내가 소위 '자덕(자전거 마니아, 오타쿠)'이 될 줄은 꿈에도 생각 못했다. 그때만 해도 아직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런 것처럼 나 역시 자전거란 자동차나 오토바이보다 저렴한, 탈것 정도라는 인식에서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이다.
백만원이 넘는 자전거의 존재도 몰랐었고, 그게 있다는 걸 알았다면 나 또한 "자전거가 100만원이 넘는다고? 그 돈이면 오토바이나 중고차를 사겠다"라고 했을 것 같다.
첫 자전거, 그리고 아버지 손에서 벗어난 자전거 타는 기쁨
자전거를 처음 배웠던 시절을 기억하는지.
초등학교 3학년 때 어린이날 선물로 받은 선경스마트 자전거로 배웠다. 넘어지는 방향으로 핸들을 꺾으라는 말을 수 없이 들었지만 이론적으로 아는 것과 실제로 하는 건 항상 다른 법. 결국 며칠 만에 뒤를 잡아주시던 아버지의 손이 자전거에서 떨어지는 순간 자전거를 탈 수 있게 되었다. 그때의 기분은 요즘으로 치자면 스트라바(GPS기반 자전거 경쟁게임 어플) 구간에서 내 자전거 주행 기록이 제일 상위에 올랐을 때 기분의 100배 정도 됐던 것 같다.
자전거는 자동차운전처럼 이론적으로 정해진 방법과 공식대로 타는 게 아니라, 언어로 표현하기조차 어려운 복잡한 신체감각에 의해 균형을 잡고 나아가는 것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세컨드바이크'… 자전거와의 이별
두 번째 자전거는 초등학교 6학년 생일 때 부모님께서 사주신 삼천리 검정색 생활용 MTB(산악자전거)였다. MTB가 국내에 막 알려지기 시작한 시기로 MTB가 뭔지도 몰랐다. 다만 굵고 튼튼한 타이어가 탑재된 자전거가 크게 유행했던 때였고, 우리나라에서 MTB 붐이 일던 시기와 맞물려 있었다. 자전거에 달린 변속기(앞 3단, 뒤 5단)는 그야말로 신세계였다. 그 당시 일반 생활자전거나 로드바이크는 변속을 하려면 다운튜브나 헤드튜브로 손을 뻗어야 했는데, MTB는 물론 내가 타던 '철티비'도 핸들에서 손을 떼지 않고 간단하게 레버를 돌려 변속이 가능했다. 이전 자전거로는 상상도 못하던 가파른 언덕도 올라가고 평지에서 더 빠른 속도를 낼 수도 있어 신기했었다.
하지만 주변에서 어떤 애가 불량청소년들에게 자전거를 강탈당했더라는 사례도 종종 들리고 단지를 벗어나면 바로 도로가 있으니 사고위험도 다분해서 부모님께서는 내가 자전거를 타고 아파트단지 밖으로 나가는 걸 별로 안 좋아하셨다. 단지 안에서만 타기엔 재미가 없으니 결국 자전거를 안타게 되었다. 중학교 내내 방치되었으며 심하게 녹이 슬어 고등학교에 갔을 땐 폐차 운명을 맞았다.
독자들의 PICK!
자전거와의 인연은 여기서 끝나는 듯 했다. 자동차를 매우 좋아해서 용돈으로 각종 자동차잡지를 사다 보며 차에 대한 간접 체험을 즐기던 나로서는 어른이 되면 돈을 모아 마음에 드는 차를 뽑아 드라이빙을 즐기는 꿈을 키웠다.
한편 고등학교 1학년말, 운동장에서 축구경기 중 무릎이 꺾이는 부상을 입었다.
인대손상이 의심스러워 물리치료를 받아도 걸을 때마다 관절이 어긋나는 고통이 없어지지 않아서 MRI로 확인해보니 연골이 파열됐단다. 결국 고2 여름방학에 입원, 내시경 레이저수술로 연골 손상부분을 제거하고 한동안 목발 신세를 져야 했다.
퇴원할 때 담당 의사 선생님께서 말씀하시길
"무릎연골을 제거한 상태이므로 주변 근육이 발달되도록 운동을 하도록."
"어떤 운동이 좋나요?"
"자전거가 무릎에 좋단다."
"아, 그렇군요."
미국에서 만난 자전거, 다시 시작한 인연
하지만 수능을 앞둔 고등학생이 자전거를 타고 다닐 시간이 날 리가 만무했다. 통학을 하자니 마땅히 교내에 주차할 만 한 곳이 있지도 않고, 그때만 해도 자전거가 일반 차도를 달리면 안 되는 줄 알았다. 더군다나 "갖고 싶다고 졸라서 사줬더니 안 타서 버렸다"는 전례가 있어 부모님을 조를 수도 없고 무엇보다 자동차에 빠져있던 터라 자전거에 별 관심이 없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고등학교 졸업을 앞두고 있었다. 미국에 계신 친구 부모님의 지인 덕에 친구와 함께 미국 서부로 여행을 떠났다. 산호세에 있었던 그분 집 차고에 세워져 있던 생활자전거를 잠깐 타보니 허벅지 근육이 살아나는 듯한 느낌이 전해졌다.
"와, 이거 재미도 있고 운동도 된다"는 감탄과 동시에 내 무릎을 치료해 주신 의사선생님의 말씀이 생각났다.
"자전거가 무릎에 가장 좋다"는 것. 결심이 섰다. 바로 인근 바이크샵에서 예산에 맞춰 자전거를 한대 샀다. 미국의 UNIVEGA란 브랜드에서 나온 MTB인 ALPINA 503이란 모델이었다. 그룹셋은 시마노 STX-RC(지금의 Deore급)와 STX(지금의 Deore 바로 아래급)인 Alivio가 혼합된 것이었는데, 이전에 타던 것들과 비교도 안될 만큼 기어변속이 정교하고 주행감이 좋았다. 무게는 12kg이 넘었던 것으로 기억하며 한국에 와서야 이 자전거가 산악자전거(Mountain bike=MTB)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관련 서적들을 찾아보기도 하고 인근 자전거가게에서 정비도 받고 동호인들과도 어울렸다. 그러면서 간단한 지식을 쌓게 되었는데 나름 공부하면서 알게 된 나쁜 소식은 이 자전거 사이즈가 내 사이즈가 아니었다는 것이다.
26인치 휠을 미니벨로처럼 보이게 만드는 거대한 프레임은 키 185cm 이상의 장신에게나 맞는 사이즈였던 것이다. 더군다나 로드바이크도 하이브리드도 아닌 상대적으로 싯튜브의 사이즈가 작아야 하는 산악자전거가 아닌가.
그럼에도 온로드용으로 불편한지도 모르고 탔다가 1996년 8월, 지금은 고인이 된 당대 국내 다운힐 제왕 최형보 선수를 비롯한 동호인들과 가리왕산에 갔었다. 1000m가 넘는 해발을 넘나드는 수십km의 코스를 업다운하며 얻은 건 지금 이 자전거로는 산에서 탈 수 없을 뿐 아니라 동호인들과 어울리지도 못하겠구나 싶다는 생각뿐이었다. (그 당시 거의 모든 자전거동호회는 MTB 위주였다.) 언덕은 그런대로 올라갈 수 있었지만 문제는 내리막. 자갈밭으로 된 임도에서 커다란 프레임으로 인한 높은 자세는 불안했고, 서스펜션 없는 포크로 인해 진동이 뇌까지 전달됐다. 진동으로 손이 아프고 시야 확보가 안 되는 건 물론이었다.
나에게 맞는 산악자전거와 업그레이드
결국 모아놓은 용돈을 모두 긁어모아 압구정의 한 자전거가게에서 사장님이 타던 MTB GT avalanche를 분양받았다.

학생으로서 다소 무리해서 장만한 avalanche는 그만큼의 가치를 해줬다. 사이즈가 맞으니 훨씬 편했고 ROCKSHOX의 서스펜션 포크는 어떤 험로에서도 조향성과 안정감을 보장해줬다. 파이프의 중앙부위를 얇게 깎아내는 버티드 공법이 적용된 알루미늄 프레임과 Deore LX, XT로 구성된 구동계 조합으로 기존에 타던 자전거보다 1.5kg이나 더 가벼웠다. 이 자전거는 길이 됐든 산이 됐든 어디로든 나를 원하는 곳으로 인도했다. 또한 PC통신 천리안의 자전거동호회 'go bike'의 운영진으로 만들어주기도 했다.
도로에서는 경제적이고 간편한 교통수단, 업힐에서는 효과적인 운동기구, 산에서는 신나는 레포츠용품이었으며, 동호인 사이에서는 대인관계를 돈독히 해주는 매개체였다. 대회 완주를 거듭하며 시합까지 나갔다. 주인의 애정을 가득 받은 이 MTB의 LX부품들은 모두 한 등급 위인 XT, 허브는 XTR로 바뀌었다. 황토색 JUDY XC포크 역시 보다 고급인 노란색 SL로 바뀌었다.

이 자전거는 새 MTB를 장만한 2009년까지 탔는데 96년부터 탔으니 햇수로 14년 탄 셈이다. 알루미늄 프레임이 수명이 짧다는데 이후로도 친한 친구가 지금껏 잘 타는 것 보면 관리하기 나름이 아닌가 싶다.
한편 2003년 꿈에 그리던 첫 자동차를 갖게 되었다. 하지만 기쁨도 잠시, 자동차는 어디까지나 생활필수품일 뿐 자전거만큼 즐거움을 주는 물건은 못 된다는 걸 알게 되었다. 물론 그 이후 중간중간 차종을 바꿔가며 드라이빙의 즐거움을 추구하긴 했지만 그때뿐이었다. 곰곰이 생각해보면 많아야 100kg도 안 되는 사람을 실어 나르기 위해 1톤이 넘는 쇳덩어리가 동원되고 지구가 수 억 년 동안 지층에 모아놓은 귀중한 에너지를 낭비 한다는 게 좀 부당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가. 학창시절 경제적 여건이 안돼서 자전거를 탔지만 마음속으로 자동차를 동경하던 내가 자동차보다 자전거를 더 좋아한다는 사실을 자동차를 탈 수 있는 여건이 되면서 깨달았다.
취향과 목적에 맞는 다양한 자전거 타기
2004년, MTB를 오래 타다 보니 보다 빠른 자전거가 갖고 싶었다. 사람의 힘으로 움직이는 탈것 중 가장 빠른 것. 리컴번트가 있긴 하지만 부피가 커서 보관성과 휴대성이 좋지 않다. 평지에선 빠르고 편하겠지만 업힐과 조향 성능은 부족할 것임에 틀림없다. 결국 관심은 일반적인 자전거 중 가장 빠른 로드바이크에 쏠렸다.
원래 나는 로드바이크에 큰 관심이 없었다. 자전거에 입문할 당시 대세는 MTB로 기울어진 지 오래였고 로드바이크는 당시 사양화 추세라 사이클링을 오랫동안 즐겨 타온 어르신들을 제외하면 타는 사람들이 별로 없었다. 심지어 자전거 전문잡지들도 로드바이크는 전혀 다루지 않을 정도였다. 대학에선 매년 연례행사로 전국일주를 하는 특성상 로드바이크 위주였던 사이클 동아리에서 활동했지만, MTB에만 빠졌던 나는 전국일주도 로드바이크도 별 관심이 없었다. 무릎수술 받은 지 얼마 안 되어서 기어비가 무거운 게 싫었고 변속할 때마다 탑튜브의 더듬이레버를 만져야 하는 게 싫었으며 소재나 신기술의 적용이 MTB에 비해 인색했던 것 등 진보와 첨단을 추구하는 20대 초반 젊은이에게 당시의 로드바이크는 매력적이지 못했다.

그런데 21세기가 되니 로드바이크도 바뀌기 시작했다. 보급형은 크로몰리 대신 알루미늄으로 바뀌어 보다 가벼워졌고 기어가 많아지면서 가벼운 기어비가 적용되어 편한 업힐이 가능해졌다. 어헤드셋이 적용되어 보다 심플하고 현대적인 디자인으로 바뀌었다.
그렇게 알루미늄 프레임에 105 구동계의 자이언트 TCR2 aero로 시작한 로드바이크 라이프는 2007년 보다 사이즈가 잘 맞는 풀카본 프레임셋에 울테그라 그룹셋이 탑재된 SCOTT CR1 pro로 바뀌면서 오늘날에 이르고 있다.

나는 개인적으로 수 십 명이 모이는 그룹라이딩 보단 마음 맞는 소수의 사람들과 같이 라이딩하는 것을 즐기는 편이다. 스피드에 빠져 로드바이크를 샀지만 정작 주변에 알고 지내는 동호인들은 아직 MTB를 많이 타던 시절이라 자주 못 탔다. 2009년 라이트스피드 타나시라는 MTB를 구입한 데엔 그런 배경이 있었다. 90년대 이후 오랫동안 스포츠 사이클 업계를 지배한 MTB였기 때문에 영원히 지속될 것만 같았다.
하지만 2010년대 들어 모두의 예상을 뒤엎고 로드바이크가 자전거시장을 지배하기 시작했다.

MTB타던 사람들뿐 아니라 미니벨로 타던 사람들, 픽시 타던 사람들, 심지어 인라인스케이트 타던 사람들도 대거 로드바이크로 이동했다. 로드바이크로 자전거에 입문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자전거 인구가 차츰 늘고 자전거도로가 전국적으로 정비되면서 좋은 노면에서 재 성능을 발휘하는 로드바이크의 가치가 떠오른 것도 이유가 될 테고, 그간 시장을 오래 지배해온 MTB에 대한 식상함 때문도 있었을 것이다. 내가 자전거 입문할 때와는 정반대로 지금은 젊은 사람들이 로드바이크를, 어르신들이 MTB를 선호한다.

나는 지금 두 대의 자전거를 번갈아 타고 있다. 2007년식 스캇 CR1 로드바이크와 2009년식 라이트스피드 타나시 MTB. 용도는 자전거출퇴근이 주목적이지만 평일저녁 번개나 주말 라이딩에 참가하기도 한다. 하절기에는 주로 로드바이크를, 동절기에는 주로 MTB를 탄다. 힘이 적게 들고 속도가 빠른 로드바이크, 승차감과 안정감이 좋고 튼튼한 MTB 모두 일장일단이 있다.
출퇴근용으로 꾸미다 보니 MTB 타이어는 슬릭으로 바꾸고 거래처를 오가다 보니 뒤에는 짐받이가 추가됐다. 산에 갈 일이 생긴다면 다시 블록타이어로 바꾸고 짐받이는 떼면 되니까 자전거는 즐거운 레저용품, 효과적인 운동기구, 훌륭한 교통수단 이 세 가지 특성을 동시에 누릴 수 있는 유일한 인류의 발명품이다.
자전거를 탈 수밖에 없는 이유
혹 2000년대 중반까지 한강에 인라인스케이트가 줄을 잇던 시절을 기억하는가. 불과 10년 전의 일이었지만 지금은 추억의 장면으로만 남아있다. 단순히 유행이 지나서이기도 하겠으나 즐거움과 운동효과 측면에서 탁월한 인라인스케이트가 꾸준히 저변을 확대하지 못한 데엔 실용적인 이동수단으로 쓸 수 없었던 게 크지 않았나 싶다.
하지만 자전거는 교통수단으로서의 제 몫을 톡톡히 한다. 게다가 다른 교통수단과 달리 매연이 없다. 또한 불필요한 에너지소비가 거의 없어 탄소 배출량이 매우 적고 환경을 보호한다. 교통체증 상황에선 자동차보다 빠르고 만원 전철보다 쾌적하다. 운동 효과를 무시할 수 없다.
지난해 여름, 자전거 출퇴근을 재개한 지 3개월 만에 허리띠가 무려 두 칸이나 줄었다. 뱃살은 결혼과 함께 나이를 먹을수록 자연스레 찌는 것이라 수긍했던 터라 기대하지 않은 의외의 선물이었다. 맞바람을 들이마시며 출퇴근하면 그날 하루의 스트레스가 모두 날아 가는듯한 기분이 든다. 오랜 기간 함께하며 평생친구가 된 자전거들은 내 건강이 허락하는 한 끝까지 내 무릎 사이에서 열심히 목적지로 날 인도해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