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300-2014 근로자 리포트-②]'무한노동' 화이트칼라, 근로시간 규제·기업문화 개선돼야

29살의 박모씨는 지난해 입사한 2년차다. 이름만 대면 남들도 모두 부러워하는 대기업에 입사했지만 그 기쁨도 잠시. 늦은 저녁까지 이어지는 야근도 모자라 부서내 막내라는 이유로 잔업무까지 처리하다보니 하루 24시간이 부족할 지경이다.
박씨가 더욱 견디기 힘든건 '상사의 눈치보기'다. 저녁 퇴근할 무렵 들려오는 부장의 "자~ 다들 밥이나 먹고 오지?"란 말을 들으면 숨이 턱 막힌다. 오늘 일을 다 끝내 눈치를 보면서 짐을 챙기다가도 이 말을 듣고 "네! 어떤 메뉴를 드실까요?"라고 대답하는 자신을 보고 있노라니 서글픈 생각이 든다.
급기야 박씨는 일을 많이 해도 통장에 찍히는 월급이 똑같자 부장님께 조심스레 야근수당을 꺼냈다. 하지만 "연봉에 이미 포함됐다"는 얘기만 듣고 돌아서야했다. 야간근로 등 연장근로에 대한 수당을 급여에 포함시켜 일괄 지급하는 연봉계약을 맺었기 때문이다.
할 일이 없는데도 상사가 남아 있으면 없던 일도 만들어 야근을 하기도 한다. 박 씨에게 '칼 퇴근'이란 용어는 아직까지 남의 나라 일이다. 박씨는 매일 13시간 정도를 일하는 셈이니 주 평균 근로 시간은 64시간에 달한다.

IT벤처 회사 8년차 베테랑 이모씨의 상황은 더하다. 그는 지난 한해 4000시간 넘게 일을 했다. 주 단위로 환산하면 77시간을 웃돈다. 이 씨는 오전 6시에 일어나 출근한 뒤 새벽 2시가 넘어서야 야근을 마친다. 하루 서너 시간밖에 잠을 자지 못하는 살인적 생활의 연속이다. 프로젝트 마감일이 다가오면 회사에서 철야도 다반사다. 물론 야근비는 없다. 프로젝트에 성공하면 성과급은 나오지만 일하는 강도에 비하면 새발의 피다.
이 씨는 "주당 100시간 근무가 농담이 아니다"며 "프로젝트 작업 기간이 짧을수록 야근과 철야 근무가 심하다"고 말했다. 주변 동료들도 대부분 같은 일과를 공유해 서로들 "내가 왜 일반 기업을 안가고 벤처를 택했을까"라고 후회한 게 한 두번이 아니다. 이씨는 업계에서 매우 잘나가는 개발자다. 한때 대기업에서 스카웃 제의까지 들어왔을 정도다. 벤처를 키우겠다는 소신에 이를 거절했다.
하지만 혹사당하는 요즘 "왜 이를 거절했을까" 땅을 친다. 정신마저 피폐해졌다는 생각에 "자유롭게 일하기 위해 자영업이라도 차리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치킨가게를 시작해도 근근히 버티며 입을 풀칠하기도 힘들다는 얘기를 듣고 망설이고 있다. 그는 앞으로 더 얼마나 버틸 수 있을지"라고 토로했다.
중앙 정부부처에서 일하는 서기관 김모씨(41살)는 항상 '저녁이 있는 삶'을 꿈꾼다. 하지만 현실은 참담하다. 급기야 얼마전 야근을 하다가 병원 신세를 지고 말았다. 격무에 따른 과로로 일을 하다가 갑자기 쓰러진후 김씨는 "아! 내가 벌써 건강이 이렇게 나빠졌다니"라는 탄식과 함께 충격에 휩싸였다. 운동을 잘하는 김씨는 그동안 "건강에는 자신있다"는 말을 입버릇처럼 달고 살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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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을 준수하고 국민에게 모범이 돼야할 중앙 부처 공무원들에겐 야근은 일상화돼 있다. 주 40시간 근무라는 법조문이 쑥쓰러울 정도로 야근도 모자라 주말출근에 출근하는 것을 밥먹듯이 하는 사람도 부지기수다. 김씨는 "정부가 장기간 근로 관행을 개선하기 위해 '초과근무 총량 관리제'를 도입했지만 쉽게 지켜지지 않는 분위기"라고 토로했다.
◇열악한 한국인의 근로 여건, 근로기준법 이대로?

지금은 정계 은퇴를 선언한 손학규 새정치민주연합 상임고문이 지난번 18대 대선 당시 야당 대통령 후보 경선에서 '저녁이 있는 삶'이란 캐치프레이즈를 들고 나왔을때 많은 사람들이 환호했다.
대부분 후보들도 앞다퉈 저녁을 근로자들에게 돌려주겠다며 근로 문화 혁신을 약속했다. 하지만 여전히 변한 것은 아무것도 없고 현실은 녹록지 않다.
한국 근로자들의 열악한 근로 여건은 OECD(경제협력개발기구) 통계로도 입증된다. 한국 직장인의 연간 평균 근로시간은 2013년 말 기준으로 2163시간. OECD 회원국 중 2위다. OECD 평균 1770시간보다 393시간이 더 길다. 하루에 9시간 근무할 경우 약 43.6일이나 더 일하는 것이다.
현행법상 법정근로시간은 주 40시간이다. 2003년 8월 이런 내용의 근로기준법 개정안이 국회를 통과했다. 하지만 법보다 가까운 '고용부 행정지침'에는 노사 합의시 평일 12시간, 주말·휴일 16시간을 더해 총 최대 68시간까지 근무를 할 수 있도록 돼 있다. 고용부가 2000년 9월 현장에 내려보낸 지침이 법률 개정 이후에도 버젓이 통용되며 전 국민의 '저녁'과 '주말'을 앗아가고 있는 셈이다.
국회를 중심으로 근로시간을 주당 52시간으로 제한하는 방안이 논의됐지만 경제단체·기업 등의 반발이 워낙 커 합의엔 이르지 못하고 있다.
이러한 방안이 합의된다면 2004년 7월 주5일제 근무제 시행이후 10년 만에 가장 큰 변화가 일어날 것으로 전망이다. 하지만 합의는 쉽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이미 권성동 새누리당 의원이 발의한 근로기준법 개정안이 논란의 중심에 섰다. 지난달 2일 권 의원은 휴일근로를 연장근로에 포함하는 내용을 골자로 하는 '근로기준법 개정안'을 발의했다.
개정안에는 휴일근로를 연장근로에 포함해 현행 주당 68시간(법정근로 40시간, 연장근로 12시간, 휴일근로 16시간)에 달하는 장시간 근로를 주 52시간으로 개선한다는 내용이 포함됐다.
다만, 근로자 대표와 서면 합의에 의해 사유 및 기간, 대상근로자의 범위 등을 정했을 경우 추가연장근로 8시간을 허용한다는 내용이 담겼다. 사실상 주당 60시간의 근로를 허용하는 셈이다.
이에 새정치민주연합과 노동계는 '근로시간 단축이 아닌 연장법안'이라며 일제히 반발했다. 새정치연합과 노동계는 주당 52시간으로 개선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유연한 근로시간 등 법 뿐 아니라 문화 변화도 필수
미국과 일본에서는 '재량근로제'나 '화이트칼라 이그젬션(exemption·배제)'을 적극 활용하고 있다.
재량근로제는 노사가 서로 서면으로 합의해 근로시간을 산정하는 방법이다. 근로시간이 정한 시간보다 많든 적든 정한 시간 만큼만 근로한 것으로 보기 때문에 야근을 할 유인이 줄어든다.
예를들어 근로자가 하루 6시간을 일하겠다고 서면으로 합의하면 6시간을 넘게 일해도 추가 수당이 지급되지 않아 정해진 시간안에 업무를 해결해야 한다. 정해진 시간 안에 일을 마쳐야하기 때문에 업무 효율을 높일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화이트칼라 이그젬션은 사무직에 초점을 맞춘 제도이다.
1938년 미국에서 공정노동기준법 개정으로 정착된 제도로 화이트칼라 근로자에 대해서는 연장근로수당을 지급하지 않고 추후 성과로 보상하는 내용이다.
이 제도가 성공적으로 정착되려면 연공급 호봉제나 포괄임금제 대신 '성과연봉제'가 전제돼야 한다.
독일을 비롯해 유럽연합(EU) 국가들이 도입한 '근로시간 저축계좌제도'도 대안으로 꼽히고 있다. 초과근로를 했을 때 수당을 받는 대신 초과근로시간을 적립해뒀다가 경기불황기등에 유급휴가로 활용하는 제도다.
이미 우리나라에서 시행되고 있는 제도에 대해서도 확대·적용할 필요성이 제기되고 있다. 주 40시간을 근무하되 출퇴근·근무시간·근무일을 자율 조정하는 '탄력근무제', 특정 근무 장소를 정하지 않고 정보통신망을 이용해 근무하는 원격근무제'를 눈치 안보고 쓸 수 있는 기업 문화가 형성돼야 한다는 지적이다.
배규식 한국노동연구원 노사·사회정책연구본부장은 "재량근로제나 탄력적 근로시간제의 활성화, 연장근로에 대한 보상 방법의 개선, 원격근무제, 근로시간 규제의 적용제외 범위 현실화 등 근로시간 규제 전반에 걸친 개선도 중요한 과제"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