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클린2015]<5>'잊혀질 권리'vs'알 권리 침해'…개인정보 파기 관련 법 미비
# 5년 전 대중의 인기를 받던 유명 가수는 과거 한 포털 사이트에 올린 글 때문에 연예계 활동을 중단해야 했다. 이 가수는 수년 전 포털 사이트 게시판에 병역을 면제받을 수 있는 방법을 묻는 글을 올린 일이 드러나면서 여론의 거센 질타와 함께 검찰 수사까지 받아야 했다. 이 사건이 대중의 기억 속에서 잊혀져 갈 때쯤 그는 재기를 시도했지만 쉽지 않았다. 인터넷 공간에서 떠돌고 있는 낙인 탓이다.
혹자는 요즘 세상을 ‘퍼즐의 시대’라고 말한다. 손쉽게 구글 등 인터넷에 접속해 특정인을 검색하면 무한대 정보가 눈앞에 쏟아진다. 커뮤니티 게시판, SNS 등에 남긴 족적 때문이다. 사이버 공간에 남긴 족적들은 정보 주체의 의지와 전혀 관계없이 무한대로 흩어져 있어 언제든 쉽게 남용될 수 있다.어떤 정보를 어떻게 조합할 것인지는 퍼즐 놀이처럼 순전히 개인의 의지에 달린 셈이다. ‘잊혀질 권리(Right to be forgotten)’가 등장한 것도 이같은 시대적 맥락에 닿아있다.

◇‘현대판 주홍글씨’ vs ‘표현의 자유 알 권리는 어떻게’=‘잊혀질 권리’란 개인이 포털 등 온라인 사업자에게 자신과 관련된 정보를 삭제하거나 확산을 방지하도록 요청할 수 있는 권리를 말한다. 2009년 스페인 변호사 마리오 코스테하 곤잘레스가 구글에 게재된 정보를 삭제해 달라고 요청한 것이 잊혀질 권리 논쟁의 발단이다.
핵심은 ‘개인정보’다. 스스로 잊고 싶을 만큼 끔찍한 과거사를 불특정 다수가 이용하는 인터넷이 기억하고 있다는 것은 개인 입장에서 두려운 일이다. 인터넷을 이용하면서 불편을 호소하는 사례 중 개인정보 유출로 인한 피해 사례가 상당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미래창조과학부와 한국인터넷진흥원이 주도한 ‘2014년 인터넷이용실태조사’ 설문에 따르면 인터넷 불편, 피해 경험 사례 중 개인정보 요구 및 유출로 인한 피해를 호소한 건수가 절대 다수를 차지했다.
한국인터넷진흥원이 2012년 실시한 ‘잊혀질 권리의 국내 제도 도입 반영 방안 연구’ 설문조사에서 개인들의 디지털 기록 중 자신이 쓴 게시판의 글이나 인터넷 이용기록, 온라인 쇼핑 내역 등 개인정보에 대한 기록이 없어져야 한다는 의견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잊혀질 권리’ 제도 도입 필요성에 대해 대부분이 공감하고 있다는 얘기다.
오대한 변호사는 최근에 쓴 ‘잊혀질 권리에 대한 법적 고찰’이라는 논문에서 “사이버스 공간에서 사소한 개인정보는 디지털 주홍글씨가 돼 개인의 인격권을 심각하게 침해할 수 있다”며 “잊혀질 권리는 정보주체의 기본권 보호 측면에서 응당 보호돼야 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다만 그 권리 범위와 방법에 있어서는 차이가 있다. 자기 정보에 대한 결정권이 본인에게 있는 만큼 정보 주체에 전권을 줘야 한다는 주장도 있는 반면, 표현의 자유와 알권리를 침해하지 않는 선에서 권리를 인정해야 한다는 신중론도 만만치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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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혀질 권리를 전면 허용하기에는 적잖은 부작용이 따른다. 공적인 인물을 다루는 언론의 경우 특히 잊혀질 권리에 민감하다. 예컨대 정치인이 잊혀질 권리를 내세우며 비판적인 기사와 보도에 대해 삭제를 요구하는 것은 표현의 자유와 대중의 알권리와도 배치된다.
잊혀질 권리를 위한 개인정보 전면 파기가 미래 성장동력으로 거론되는 빅데이터의 활용을 저해하는 요소가 될 수도 있다. 전문가들은 빅데이터를 활성화하기 위해서는 개인정보와 관련한 규정을 풀어줄 필요가 있지만, 지나치게 완화하다 보면 기존 개인정보보호 장치가 무력화될 수 있다는 점을 우려한다.
김현철 정보통신산업진흥원 책임연구원은 “빅데이터 분석을 위해서는 보다 많은 개인정보가 필요한데 개인정보를 파기하면 데이터 양은 줄어들 수밖에 없다”며 “빅데이터에 대한 필요성이 있는 공익적인 부분에서는 개인정보보호 규정을 제한적으로 활용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뉴스 디지털라이브러리 사업도 비슷한 딜레마를 갖고 있다. 과거 수십년 전 사건 기사 등에 언급된 인사들의 권리 침해 문제나 기고자들의 저작권 문제가 ‘복병’으로 남겨져 있다.
◇개인정보 파기 강제수단 無…방통위, 법제화 추진=개인정보 파기에 대한 법률 적용 문제도 잊혀질 권리를 둘러싼 또 다른 핵심 쟁점이다. 잊혀질 권리를 처음으로 인정한 유럽사법재판소(ECJ)는 곤잘레스가 구글에 제기한 개인 정보 삭제 소송과 관련해 유럽 개인정보보호지침 규정에 의거, 구글에 관련 링크를 삭제하라는 최종 판결을 내렸다. EU(유럽연합)의 개인정보보호지침은 잊혀질 권리와 정보삭제권, 정보처리자의 의무사항 등을 명시하고 있다. 반면 미국의 경우 잊혀질 권리에 비해 표현의 자유와 알권리에 보다 무게를 두고 있다는 측면에서 유럽과 분위기가 사뭇 다르다.
우리나라는 어떨까. 개인정보법에 따르면 정보주체는 개인정보를 처리하는 사업자에게 개인정보에 대한 열람, 정정, 삭제를 요구할 수 있다. 사업자는 해당 정보에 대한 삭제 요청을 받으면 적절한 조치를 하고 정보를 게재한 이에게 알려야 한다. 그렇다고 모든 개인이 정보에 대한 삭제 권리를 행사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개인정보 삭제 권리는 사생활 침해나 명예훼손이 있는 경우에만 요구할 수 있다. 사업자들의 개인정보 파기를 강제화할 수단도 마땅치 않다.
방송통신위원회는 잊혀질 권리에 대한 법제화 여부를 검토 중이다. 방통위 ’개인정보의 기술적·관리적 보호조치 기준‘ 개정안에 따르면, 사업자들은 각자 환경에 맞는 개인정보 보호조치 기준을 수립해 시행하고 개인정보 유출 시 신속한 조치를 취하기 위한 절차를 구비해야 한다. 방통위는 오는 15일 ’잊혀질 권리 보장을 위한 세미나‘를 통해 잊혀질 권리에 대한 이슈를 공론화하고 실질적인 권리보장 방안을 수립하기 위해 전문가 의견을 수렴할 계획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