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5년 10월 8일 새벽. 일본 군대와 낭인(부랑자)들이 경복궁에 난입해 왕비를 무참히 살해하고 그 시체를 불태웠다. 작전명 '여우사냥'으로 자행된 을미사변이다.
올해는 광복 70주년 해인 동시에 을미사변 발생 120주년이다. 한 나라의 왕비가 다름 아닌 왕궁에서 외국 낭인들에 의해 살해된 이 날은 우리 민족에게 치욕스럽고 분한 역사의 한 장면으로 남았다.
그런데 명성황후 살해범이 낭인이 아닌 일본군이라는 주장이 나왔다.
이종각 동양대학교 교양학부 교수는 을미사변을 '군사작전'의 시각으로 바라본다. 일본 대본영으로부터 '반일친러' 세력의 중심인 명성황후를 시해하라는 명령을 받고 조선에 부임한 미우라 고로 주한공사가 치밀한 계획하에 진행한 군사작전이라는 것. 일본군이 조선의 왕비를 살해하는 중대한 임무를 낭인에게 맡겼을리 없으며 후일 외교적 책임을 약화시키기 위해 민간인인 낭인들을 대동, 그들을 주범으로 위장했다는 논리다.
저자는 경성수비대 소속이었던 '미야모토 다케타' 소위를 범인으로 지목한다. 당시 미우라 공사가황후살해 사건에서 철저히 배제시켰던 인물인 우치다 사다쓰치 주한영사가 보고한 '우치다 보고서'에는 왕비를 살해한 자가 '수비대의 어느 육군소위'라고 적혀 있었다. 저자는 당시 경성수비대에는 4명의 소위가 있었으며 당일 기록에 등장하는 두 명의 소위 중 미야모토만이 왕비 살해 현장에 있었다는 증언이 기록됐다고 밝힌다.
추후 미야모토 소위를 조사한 일본 정부의 의심스러운 대처도 미야모토 범인설의 근거로 제시됐다. 하급장교에 불과했던 미야모토의 일본 귀국 동정이 대본영 수뇌부에 세세히 보고됐고 미야모토는 1년 9개월 뒤 타이완 헌병대로 발령 받았다. 저자는 일본군이 그를 항일투쟁이 극심했던 사지로 보내 입막음을 하려 한 것으로 해석한다. 타이완 교전 중 사망한 마야모토가 야스쿠니 신사에 합사되지 못한 점도 예를 들며 이웃나라 왕비를 살해한 자를 야스쿠니 신사에 모시는 사실이 밝혀질 경우 대외적 물의를 빚을 것을 우려한 처사로 봤다.
저자는 일본군 부대에 소속된 현역 장교가 시해범일 경우 당시 일본 정부의 법적·외교적 책임은 더욱 무거울 수 밖에 없다고 지적한다. 일본 정부차원의 위안부 동원·강제징용 배상 문제와 더불어 일본정부는 물론 우리 정부에게도 남겨진 역사적 숙제다.
◇미야모토 소위, 명성황후를 찌르다=이종각 지음. 메디치미디어 펴냄. 312쪽. 1만50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