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의 작가 올더스 헉슬리의 장편 소설 1932년 작 ‘멋진 신세계’는 제목과 영 딴판의 이야기를 다룬다. 생화학무기가 등장하는 전쟁 이후 모든 인류를 통제하는 정부가 등장하고, 인간은 인공수정으로 태어나 20억 명 정도로 관리된다. 계급이 분리되고 모든 태아는 계급이 맞게 능력이 주입된다. 야만인으로 분류되는 이들은 결국 우울한 결말을 맞이한다.
한태섭, 김현우 감독이 연출하고 강현주 작가가 대본을 쓴 SBS 드라마 ‘멋진 신세계’도 과거 영국 소설의 영향력에서 벗어났다고 하기에는 쉽지 않다. 물론 주인공들의 이야기를 모아서 엮은 제목이지만 ‘멋진 신세계’처럼 반어법이 없다고는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굉장히 아이러니하게도, 이러한 블랙 코미디 같은 설정은 드라마를 지금 시점에서 가장 도드라지게 하는 요소가 된다.
‘멋진 신세계’는 지난 8일부터 첫 방송 됐다. 희대의 조선 악녀로 명성을 떨친 강단심(임지연)이 결국 사랑하는 주상 전하에게 버림을 받고 사약을 받는데, 갑자기 죽음 직전 그의 영혼이 시간을 뛰어넘어 2026년 서울의 어느 한 무명배우 신서리(임지연)에게 옮겨가는 내용이다. 내향인에다 자신이 없었던 신서리는 빙의된 후 딴사람이 되고, ‘자본주의가 낳은 괴물’이라 불리는 재벌 3세 차세계(허남준)와 얽혀 ‘혐관’(혐오관계) 로맨스의 진수를 보여준다.
드라마는 베일을 벗기 전까지는 흔한 ‘빙의물’ ‘복합장르 로맨스’로 여겨져 왔다. 어느 정도 안정적인 기반은 있었다. 작감(작가와 감독)은 비교적 새로운 얼굴이지만 임지연이 ‘더 글로리’에 이어 ‘옥씨부인전’으로 사극도 경험했고, 최근 이정재와 함께 공연한 ‘얄미운 사랑’을 통해 코미디의 맛도 봤기 때문이다. 실제 임지연은 베일을 벗자 그야말로 ‘날뛴다’. 언제 우리가 이 배우를 ‘더 글로리’의 표독스러운 연진이로 봤던 건지, 눈을 비비게 만드는 설정과 연기가 시종일관 이어진다.
일단 ‘옥씨부인전’으로 다져진 사극의 결기는 초반 강희빈의 비극적인 최후를 그럴듯하게 끌고 가고, 중간중간 자신의 처연한 운명을 직감하는 장면에서도 무게감이 떨어지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중간중간 그거 얼뜨기처럼 눈을 뜨고 때로는 표독스럽게 눈을 뜨며 고함을 내질러도 사람들은 어색하게 받아들이지 않고, 그 온도 차를 롤러코스터처럼 유쾌하게 받아들일 수 있다.
그리고 허남준 역시 이전까지 해왔던 빌런 연기를 이어가는 남자 주인공 연기로 간극을 줄여놨다. 보통 못 된 남주와 착한 여주, 못 된 여주와 착한 남주의 이야기가 보통이었는데 못 된 여주와 못 된 남주와의 맞대결이라니. 시청자들은 이러한 비튼 설정을 1회부터 흥미진진하게 볼 수밖에 없다. 1회 궁궐 앞에서 벌어지는 ‘식물결투 장면’은 그 정점이라 볼 수 있다. 여기에 착한 것처럼 보이던 최문도(장승조)가 사실은 가장 의뭉스러운 인물이라는 점에서 이 로맨스는 악역들의 난장판이 ‘피카레스크물’로 여겨지기도 한다.
여기에 더해 ‘멋진 신세계’의 세계관은 전혀 멋지지 않다. 이야기의 두 회차를 대략만 살펴봐도 알 수 있다. 강단심이든 신서리든, 남자 주인공 차세계든 인물들의 세계는 하나도 멋지지 않다. 강단심은 뒷배도 없이 내명부 윗전에 올랐지만 수시로 살수의 기척을 챌 정도로 불안한 삶을 산다. 신서리 역시 ‘할매’(김해숙)의 행복을 위해 열심히 노력하지만, 감옥 같은 방 한 칸을 벗어날 수 없고 심지어 빙의된 날에는 소속사에서도 계약 해지를 당한다.
차세계 역시 마찬가지다. 그는 ‘갑질재벌’로 알려졌지만, 밤마다 환영에 시달리며 전생의 기억에 얽혀있고, 가족과의 식사는 입맛이 떨어질 정도로 불편하기 짝이 없다. 차세계는 자신을 노리는 사람들에게는 바늘 하나 들어갈 틈 없이 완벽한 ‘빌런’이지만, 대책 없이 자신을 품겠다고 나서는 신서리에게는 계속 신경이 쓰이고 반응하고 싶은 마음을 느낀다. 결국 ‘멋진 신세계’는 전혀 멋지지 않은 세계에서 허우적대는 두 남녀가 함께 ‘혐관’을 빙자한 더부살이를 표방한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설정은 묘하게 경쟁작인 ‘21세기 대군부인’을 보면 더욱 도드라진다. ‘21세기 대군부인’은 시작부터 대기업의 세련된 명품과 같이 화려함으로 치장한 설정으로 눈을 사로잡았다. 희주(아이유)와 이안대군(변우석)은 나름 사연이 있는 인물이지만, 입헌군주제로 표방해놓은 설정에서 타고난 상식적 비극의 수준일 뿐이다. 결국 이 걸림돌은 예쁜 필터를 낀 부티 나는 사랑을 더욱 극적으로 꾸며주는 부차적인 수단에 불과할지 모른다.
하지만 ‘멋진 신세계’의 걸림돌은 이들을 훨씬 처절하게 만든다. 이들은 서로의 마음을 알아주지 않는 대기업 대표와 권력자의 고민이 아니라, 실제 죽음의 위협을 받는 이들의 고민이다. 포장지부터 화려해 속 내용이 화려해도 티가 나지 않는 상품처럼 무언가 뻔한 경쟁작에 비해 ‘멋진 신세계’의 반전은 웃음으로 포장했지만 지나치게 처절해 오히려 차별점이 도드라진다.
일단 2주가 지나 오는 23일이 되면 ‘멋진 신세계’는 ‘21세기 대군부인’을 놔두고 혼자 달릴 수 있다. 겉으로는 빙의물, 코미디, 복합장르로 치장했지만 실상은 올더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에 못지않게 처절한 이 로맨스가 어떤 방향으로 달려 나갈지. 오랜만에 시청자들은 마음을 두고 함께 달려 나갈 이야기의 버스를 발견했다.
신윤재(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