빽빽한 빌딩 숲 사이를 걷다가 숨을 고르러 종종 가는 공간이 있다. 세계문화유산으로도 알려져 있는 선정릉 공원이다. 계절에 따라 달라지는 색채의 나무들과 다채로운 식물들이 주는 공기만으로도 마음이 정화되는 기분이 든다.
강산도 변한다는 10년을 훌쩍 넘게 그 길을 걸었지만 지난 주말에는 처음으로 다른 산책 루트를 택했다. 그렇게 우연히 마주한 것이 500년 넘게 자리를 지켜온 거대한 은행나무 보호수였다. 한참을 그 아래 앉아 나무를 바라보며 생각했다. 긴 시간을 견딘다는 것은 무엇일까.
최근 한 노래 가사에서 '영생(永生)과 영면(永眠)의 차이를 아느냐'는 문장을 본 적이 있다. '영원히 삶'과 '영원히 잠듦(죽음)'의 대비를 표현한 것이다. 어떤 작가는 '혐오(嫌惡)'와 '염오(厭惡)'를 구별해 표현했다. 혐오가 바깥의 대상을 향해 미움과 공격성을 키우는 감정이라면, 염오는 자기 안의 탐욕과 집착을 알아차리고 그로부터 한 걸음 물러서는 마음에 가깝다. 비슷해 보이는 단어 하나에도 감정의 방향과 태도의 차이가 숨어 있다.
지금 우리는 그 어느 때보다 말과 감정, 그리고 여론의 방향에 민감한 시대를 살고 있다. 누군가의 한마디는 위로가 되기도 하지만 동시에 한 기업과 브랜드를 흔드는 거대한 파도가 되기도 한다. 정치, 사회, 기업, 문화의 영역을 가리지 않고 혐오와 분노의 언어는 빠르게 확산된다. 문제는 그 감정이 사실보다 먼저 움직일 때 한 사람이나 조직의 평판은 순식간에 흔들릴 수 있다는 점이다.
그런 점에서 최근 세계 무대에서 역사를 써 내려가는 BTS의 글로벌 투어를 보며 많은 생각이 들었다. 작은 무대에서 다른 이의 빈자리를 메우듯 시작했던 시절도 있었지만, 10년이 훌쩍 지난 지금 그들은 단순한 아이돌을 넘어 한국이라는 나라의 문화적 위상을 높이는 존재가 됐다. 그 과정에서 수많은 위기와 논란, 예측할 수 없는 변수들이 있었겠지만 결국 그들은 위기를 기회로 바꾸는 법을 배웠다. 가보지 않은 길에 용기를 내어 나아가는 것, 중도에 포기하지 않는 것, 그리고 현재를 사랑하며 미래를 준비하는 태도 말이다.
기업도 다르지 않다. 오늘날 브랜드의 위기는 어느 날 갑자기 거대한 사건으로만 찾아오지 않는다. 하나의 댓글, 짧은 영상, 왜곡된 게시물, 혹은 잘못 전달된 문장 하나가 순식간에 여론이 되는 시대다. 중요한 것은 위기를 완전히 피하는 것이 아니라, 작은 이상 신호를 얼마나 빠르게 감지하고 대응할 수 있느냐다. 오래된 보호수가 강한 비바람을 견디며 살아남는 이유는 단순히 튼튼해서가 아니라 오랜 시간 환경의 변화를 버텨온 힘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결국 위기관리는 부정적인 이슈를 막기 위한 방어 전략만이 아니다. 조직이 어떤 가치와 태도를 갖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과정이며, 위기의 순간조차 브랜드의 신뢰를 쌓는 기회가 될 수 있다. 좋은 위기 대응은 감정을 없애는 일이 아니라 감정에 휩쓸리지 않고 사실과 맥락을 분리해 바라보는 일에서 시작된다. 지금 무엇이 실제 문제이고 무엇이 불필요한 확산인지 구분할 수 있어야 비로소 대응의 방향도 선명해진다.
걱정과 고민이 많다는 것은 어쩌면 그만큼 지키고 싶은 것이 많다는 뜻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기업들은 예상치 못한 상황에 대비한 '컨틴전시 플랜'을 준비한다. 위기관리는 위기를 기다리는 일이 아니라 어떤 순간에도 다시 앞으로 나아가기 위한 마음의 준비에 더 가깝다.
필자 역시 오래전부터 '좋은 소식은 더 멀리 전하고 나쁜 소식은 불필요한 오해와 확산 없이 건강하게 해결될 수 있도록 돕는 일'에 관심이 많았다. 결국 기술도, PR도, 위기관리를 위한 데이터도 사람의 불안을 키우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를 더 이해하고 연결하기 위해 존재해야 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미래를 준비한다는 것은 어쩌면 거창한 예측보다도, 지금의 작은 변화와 신호에 귀 기울이는 일에서 시작되는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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