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대 러시아·사우디아라비아의 석유 감산을 둘러싼 대립각에 국내 정유·화학, 조선, 철강업계가 동시에 떨고 있다. 반면 자동차·항공업계는 코로나19 속 호재가 될 수 있어 반기는 분위기다.
10일 관련 업계에 따르면 당분간 유가가 20달러선까지 떨어질 수 있다는 관측이 나오는 가운데 유가가 실적에 직접 영향을 주는 국내 정유업계는 감산 태세에 돌입했다.
정유업계는 특히 고민이 크다. 당장 높은 가격에 구매해 둔 원유 평가가치가 최근 유가 급락과 함께 급전직하할 위기에 처했기 때문이다. 이 같은 '재고평가손실'은 정유업계가 맞게 될 최대 단기 악재다.
전문가들은 정유사별로 원유 비축물량에 따라 최대 수 천 억원까지 재고평가손실이 가능하다고 계산한다.
업계 한 관계자는 "SK이노베이션과 GS칼텍스, 에쓰오일, 현대오일뱅크 등 정유사마다 비축해 놓은 원유 비축물량은 1000만~2000만 배럴 정도로 추정된다"며 "유가가 5달러 하락할 때 마다 업체별로 최대 1000억원 규모의 재고평가손실이 날 것으로 보인다"고 밝혔다. 지금까지 유가 하락만으로도 이미 수 천 억원대 잠재 손실을 떠안은 것이다.
유가 하락에 따른 원재료비 절감도 당분간 기대하기 어렵다는 지적이다. 또 다른 업계 관계자는 "원유를 정제해 휘발유 같은 석유제품을 만들어 팔기 때문에 유가하락은 곧 원가 절감"이라며 "하지만 이는 수요가 뒷받침될 때 이야기로 코로나 사태로 현재로선 기대하기 힘들다"고 말했다.
유가 하락 악재는 화학업계도 마찬가지다. 원유 정제 부산물로 화학제품을 생산하는 화학업체들은 유가 하락이 원가절감 요인이지만 지금은 수요 위축이 더 걱정스럽다는 반응이다.
정유업계는 이미 돌파구로 감산 카드를 꺼냈다. SK이노베이션의 정유사업 자회사 SK에너지는 울산 정제공장 가동률을 이달 안에 기존 100%에서 85%까지 순차적으로 낮추기로 했다.
수주에서 건조까지 2~3년 시차가 발생하는 조선업계도 최근 유가 급락폭이 워낙 커 예의 주시하고 있다. 자칫 저유가 추세가 장기화할 경우 유조선 발주가 위축될 수 있기 때문이다. 가뜩이나 저조한 해양플랜트 발주가 더욱 얼어붙을 가능성도 있다. 유전 개발에 투입되는 해양플랜트 시황은 통상 유가가 높을수록 개선되는 모습이다.
철강업계도 유가 급락 충격이 전방산업인 조선업에 부정적인 영향을 줄까봐 전전긍긍하고 있다. 철강업계는 조선업계가 지난해에도 시황 부진에서 탈출 못한 탓에 후판 가격을 제대로 인상하지 못해 수익성이 나빠진 상태다. 여기에 조선업이 유가급락 충격까지 받으면 올해도 후판 가격을 올리지 못할 수 있어 걱정이 많다.
재계 관계자는 "정유·화학, 조선, 철강 업계는 급격한 유가 하락이 하나도 반갑지 않다"며 "러시아와 미국의 감산을 둘러싼 갈등이 코로나19와 맞물리면 타격이 더 클 수 있어 이번 급락이 안정되기만을 바란다"고 말했다.
반면 자동차 업계는 유가 폭락의 수혜 여부를 조심스럽게 저울질하고 있다.
자동차 업계에 따르면 통상 유가 하락은 기업 비용 절감 및 유류비 감소로 이어져 업계에 호재가 될 수 있다. 그러나 코로나19로 위축된 자동차 수요가 자칫 유가 하락으로 더 불거질까 우려하는 모습이다.
여기에 국제유가 하락으로 신흥국 환율이 급변할 경우 해당 국가에 차를 수출하는 한국 기업은 불안정한 환율로 변동성이 커질 수 있다. 대표적으로 러시아의 루블화 가치는 전날 유가 급락으로 2016년 3월 이후 가장 낮은 수준을 기록했다.
권순우 SK증권 연구원은 "과거에도 유가 하락기에는 중동과 중남미 등에서 자동차 수요가 급감해 현대차그룹이 판매 부진을 경험했다"며 "환율 변동성 확대도 수출을 많이 하는 완성차와 부품사의 수익성에 부정적인 요인이 될 수 있다"고 밝혔다.
항공업계는 때아닌 유가 급락이 원망스럽다. 평상시라면 유가 하락의 대표적 수혜 업종이지만 요즘 코로나 사태로 좌석 수요가 없어 항공기를 거의 띄우지 못하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그만큼 실익이 낮다.
업계 관계자는 "항공유 중 하나인 제트연료 가격이 9일 기준 배럴당 43.49달러로 두 달 만에 50% 떨어졌지만 하나도 반갑지 않다"고 밝혔다. 그래도 항공유 가격이 지속적으로 낮아지면 항공사 입장에서는 그만큼 고정비용이 줄어 호재다.
일부에서는 대한항공과 아시아나항공은 항공유를 쌀 때 미리 구매해 보유하는 헤지전략을 쓸 수 있다고 내다봤다. 대한항공 관계자는 "유가 및 환율, 금리 등에 대해 통계적 수치와 시장 상황 등을 감안해 항공유 선구매를 시행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저비용항공사(LCC)들의 경우 이런 헤지 전략은 그림의 떡이다. 한 LCC 관계자는 "선구매를 통한 헤지 효과를 보려면 구매량이 뒷받침돼야 하는데 LCC는 그 정도로 항공유를 소비하진 못한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