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보는 세상]존경받는 기업인, 부끄러운 기업인

송지유 기자
2016.09.14 05:30
[편집자주] 뉴스현장에는 희로애락이 있습니다. 그 가운데 기사로 쓰기에 쉽지 않은 것도 있고, 곰곰이 생각해 봐야 할 일도 많습니다. ‘우리들이 보는 세상(우보세)’은 머니투데이 시니어 기자들이 속보 기사에서 자칫 놓치기 쉬운 ‘뉴스 속의 뉴스’, ‘뉴스 속의 스토리’를 전하는 코너 입니다.

"어린 시절 TV 만화 '우주소년 아톰'을 참 재미있게 봤습니다. 학창 시절 가장 좋아했던 과목은 생물이었고요. 우리가 일상에서 누리는 문물의 상당수가 기초과학에서 비롯된 것인데 정작 그 소중함은 모르고 있습니다. 과학을 포기하는 것은 곧 미래를 포기하는 겁니다. 당장 성과가 없다고 아무도 투자하지 않으면 10년, 20년 뒤 대한민국의 발전도 없을 겁니다."

서경배 아모레퍼시픽 회장이 지난 1일 과학에 대한 소회와 무한애정을 드러냈다. 사재 3000억원을 털어 '서경배 과학재단'을 설립하고 선진국에 비해 연구기반이 약한 생명과학 기초분야를 지원한다고 한다.

매년 신진 과학자 3~5명을 뽑아 5년간 최고 25억원의 연구비를 지원할 계획이다. 서 회장은 장기적으로 재단 기금을 1조원까지 늘린다고 했다. 재단을 책임지고 운영하려고 자신의 이름을 내걸었다는 설명도 덧붙였다.

국가가 해야 할 일을 기업인이, 그것도 개인 돈을 쏟아 부어 과학발전에 이바지하겠다고 결심한 것 자체가 놀랍다. 반도체와 통신, 의료 등에만 관심이 있고 수십년 장기 투자가 필요한 기초과학 연구는 뒷전으로 미루는 기업들의 현실과도 상반된 결정이다. 과학재단의 연구 성과와 아모레퍼시픽의 사업을 절대로 연결하지 않겠다고 천명한 것도 높게 평가할 만하다.

서 회장이 아모레퍼시픽 우선주를 처분해 과학재단 기금으로 쓰겠다고 한 점도 주목할 만하다. 우선주는 이사회에서 의결권이 필요 없어 일반 주식보다 상속이나 증여에 유리한 수단으로 통한다. 우선주를 내놓은 것은 그만큼 재단 운영의 순수함과 진정성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사실 지금까지 국내 기업 오너들의 사재 출연은 대부분 상속세 회피 등 특정한 목적이 있을 때 이뤄졌다. 구속 위기에 몰렸거나 형을 감면받을 때, 정권의 눈치를 봐야 할 때 약속이나 한 듯 사회에 환원하겠다며 수백억원에서 수천억원대 재산을 내놨다. 일부 기업 오너들은 재단을 사회환원 창구가 아니라 상속세를 피하는 용도로 활용하곤 했다.

최근 각각 400억원과 100억원을 내놓기로 한 조양호 한진그룹 회장과 최은영 유수홀딩스 회장의 사재 출연 약속은 씁쓸하기만 하다. 이들은 한진해운을 법정관리로 내몰고 국내 해운산업이 위기를 맞은 뒤에야 면피용 결정을 내렸다. 최 회장의 경우 한진해운 주식 96만주를 채권단 자율협약 신청직전 매각해 미공개 정보를 이용했다는 의혹을 사며 여론의 뭇매를 맞았다.

그나마 긍정적인 시그널은 국가 정책개발을 위한 공익재단에 4500억원을 쾌척한 조창걸 한샘 명예회장, 통일 재단에 2000억원을 기부한 이준용 대림그룹 회장 등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하는 기업인이 늘고 있다는 것이다. 세계 최고 부자인 빌 게이츠 마이크로소프트 공동창업자는 이제 기업가보다 자선사업가로 더 유명하다. 우리나라에도 이제 존경받는 당당한 부자가 나올 때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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