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T시평]카를 슈미트를 넘어서자

김동규 (국제시사문예지 PADO 편집장)
2025.01.16 02:03
김동규(국제시사문예지 PADO 편집장)

'정치란 친구와 적을 나누는 것이다.' 독일 사상가 카를 슈미트의 유명한 말이다. 그는 이른바 결단주의 법사상으로도 유명한데 그의 세계관이 어쩌면 한국 사회를 분열로 몰아넣는 원인이 아닌가 생각된다. 결단주의에 대해 먼저 이야기해보자. 국가의 법체계에는 '옮음' 외에 '결단'의 요소가 분명히 있다. 예컨대 자동차가 좌측통행을 할지 우측통행을 할지에 특정 정답이 있는 것은 아니다. 권위 있는 존재가 어느 쪽이든 하나를 선택(결단)해주고 모두가 따르면 법이 된다. 결단의 주체는 한 명일 수도 있고 집단일 수도 있다. 집단의 결단을 이야기하는 사상을 사회계약론이라고 따로 부르기도 하는데 루소 이후 사회계약론은 자연권 같은 '옮음'에 무심해지며 결단적 성격이 강해진다. 즉 결단주의의 일종이다. '옮음'을 법도(또는 자연법)라 부르기도 하는데 이 '옮음'의 요소를 무시하고 결단만 강조하는 것은 질서의 '성립'에 급급하기 때문이다. 좌측통행, 우측통행 하나 못 정해 자동차들이 충돌하는 무정부 상태를 당장 극복하려는 것이다.

윤석열 대통령은 '결단'이라는 표현을 자주 사용했다. 한국 법학 전통에 흐르는 카를 슈미트의 영향인지, 아니면 검찰 경험에서 나온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정책도 자세히 설명하기보다 결단해서 발표하는 성향이 강하다. 그런데 그를 비판하는 야당 쪽도 카를 슈미트적 요소가 강한 것은 마찬가지다. 그들은 '단결'을 중시한다. 조직의 구성원들이 대오에서 이탈하는 것을 무엇보다 싫어한다. 그런데 사실 결단과 단결은 같은 것이고 이들 결단주의자, 단결주의자들은 결단과 단결을 뛰어넘는 '옮음'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독선에 빠지기 쉽다. 객관적 '옮음'의 존재를 의식하면 자신이 옳은지, 옳지 않은지 늘 조심하게 된다.

결단과 단결은 사회와 조직의 '성립'을 위한 것이다. 하지만 사회와 조직은 당장의 '성립'뿐만 아니라 오랜 '존속'도 중요하다. 결단과 단결만으로는 사회, 조직의 오랜 '존속'이 불가능하다. 건축에 비유해보자. 우리는 건물을 당장 만들어내는 것(성립)뿐만 아니라 그 건물이 오랫동안 튼튼하게 유지되기를 바란다. 건축주와 건축가 등 관계자가 합의를 보면 언제든 건물은 세울 수 있다. 그 건물이 역삼각형 형태라도 합의만 보면 어쨌든 세워진다. 하지만 건물은 물리법칙을 어길 수 없다. 물리법칙을 거스른 건물은 오래가지 못하고 쓰러질 것이다. 좌측통행이나 우측통행 같은 법은 옮음과 무관한 순수 '결단'의 영역이겠지만 수많은 법엔 단지 결단뿐만 아니라 건물을 지탱하는 물리법칙처럼 인간사회를 지탱하는 법도(자연법)가 포함돼 있다. 법도를 무시하고 결단과 단결만 추구하면 반드시 위태로워진다.

'결단'을 자주 입에 올린 윤석열 대통령이나 그를 비판하는 야당 쪽 모두 법도에 대한 인식이 약하다. '옮음'은 없고 결단과 단결만 존재하는 카를 슈미트의 허무한 세계에선 친구와 적을 나누고 적에게 승리하는 것만이 유일한 목표가 된다. 하지만 물리적 법칙을 잘 지킨 건물이 오래가듯 결국 법도를 잘 지킨 쪽이 살아남는다. 어느 쪽이 카를 슈미트를 넘어설지 지켜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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