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용비리로 국민적 공분을 샀던 조직이 충분한 혁신 없이 또다시 부실관리 논란의 중심에 섰다. 우연일까. 아니다. 내부통제가 무너진 조직은 같은 실수를 반복한다.
필자는 저서 '별에서 온 감사(Audit)'에서 바로 이 점을 경고했다. 감사 기능이 형식화되고 내부통제 시스템이 작동하지 않는 조직은 결국 신뢰를 잃고, 그 대가는 조직을 넘어 사회 전체가 치르게 된다고 말이다. 당시 선거관리위원회의 채용비리 문제를 분석하며 내부통제 부실과 폐쇄적 조직문화가 초래할 위험성을 지적했지만, 안타깝게도 그 경고는 현실이 되고 있다.
최근 선관위를 둘러싼 투표지 부족 사태와 부실 선거관리 논란은 단순한 행정착오가 아니다. 이는 대한민국 민주주의를 떠받치는 핵심 기관의 관리 역량과 책임성에 대한 근본적 의문을 제기하는 사건이다. 더욱 심각한 것은 이러한 문제가 일회성 실수가 아니라는 점이다.
이미 감사원 감사에서 선관위는 대규모 채용비리와 각종 규정 위반 사실이 드러난 바 있다. 특혜채용, 채용절차 왜곡, 인사관리 부실 등은 특정 개인의 일탈이 아니라 조직 전반의 내부통제 실패를 보여주는 징후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직문화와 시스템을 근본적으로 혁신하지 못한 결과가 오늘날의 부실관리 논란으로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은 선관위 문제를 정치적 관점에서 바라본다. 그러나 본질은 우리가 부담해야 할 경제의 문제이기도 하다
노벨경제학상 수상자 케네스 애로(Kenneth Arrow)는 "모든 상거래는 신뢰를 내포하고, 신뢰가 높은 사회일수록 거래가 원활하게 이루어지고 생산성이 증가한다 "라고 말했다.
시장경제는 법률과 계약만으로 작동하지 않는다. 국민은 정부를 신뢰하고, 기업은 제도를 신뢰하며, 투자자는 국가의 공정성을 신뢰할 때 경제는 안정적으로 성장한다.
반대로 신뢰가 무너지면 모든 경제활동에 추가 비용이 발생한다. 경제학에서는 이를 거래비용(Transaction Cost)의 증가라고 부른다. 사람들은 상대방을 믿지 못하기 때문에 더 많은 검증을 요구하고, 더 많은 규제를 만들고, 더 많은 시간과 비용을 들여 위험을 확인하려 한다. 결국 사회 전체의 효율성이 떨어진다.
정치적 갈등과 사회적 불신이 심화될수록 기업의 투자 결정은 지연되고 소비심리는 위축된다. 생산적인 혁신과 성장에 사용되어야 할 사회적 에너지가 갈등과 대립을 관리하는 데 소모되는 것이다.
선관위에 대한 신뢰 훼손 역시 마찬가지다. 선거를 관리하는 기관에 대한 신뢰가 흔들리는 순간 선거 결과에 대한 논란은 반복되고, 정치적 양극화는 심화되며, 사회적 갈등 비용은 증가한다.
신뢰라는 사회적 자본이 무너진 사회에서는 사실보다 의심이 강해지고, 증거보다 불신이 영향력을 갖는다. 그 결과 정책 추진력은 약화되고 사회적 합의는 어려워진다. 기업들은 정치적 불확실성을 우려해 투자를 미루고, 해외 투자자들은 국가의 거버넌스 수준에 의문을 제기한다. 결국 투자감소, 경제성장률 하락이라는 형태로 그 비용이 국민 모두에게 돌아온다.
지금 필요한 것은 보여주기식 대책이나 정치적 공방이 아니다. 국정조사와 특검 등을 포함한 철저한 진상규명을 통해 국민적 의혹을 해소해야 한다. 동시에 선관위를 비롯한 공공기관 전반에 대해 강력한 내부통제 시스템을 구축하고 독립적인 감사 기능을 강화해야 한다. 폐쇄적 조직문화를 혁신하고 청렴의무와 윤리의식을 재정립하는 노력도 병행되어야 한다.
가장 기본적인 내부통제시스템이 작동하지 않을경우 조직은 물론 사회 전반이 큰 혼란에 빠질수 있다. 그 청구서는 결국 국민 모두에게 돌아온다. 그리고 지금, 대한민국 경제는 그 청구서를 받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