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이 변하고 있다. 카카오 등 IT 기업에서 시작된 수평적 기업문화가 사회 전반으로 확산되고 있다. 존칭없이 영문 이름을 부르거나 상사도 부하에게 '~님'이라고 하는 호칭 변화가 대표적이다. 자유롭게 근무 시간을 조율하고 업무만 마무리하면 정시 퇴근도 문제없다.
특히 밀레니얼 세대(1980년대~2000년대생)의 사회 진출이 이뤄지면서는 이같은 기업 문화 변화가 빨라진다. 변하지 않으면 뛰어난 직원을 뽑을 수 없다는 위기의식도 묻어난다. 기업들은 변화를 공부하고 적용하며 문화를 개선 중이다.
그런데 바뀌지 않는 곳이 있다. 선거철만 되면 "세상을 더 낫게 바꾸겠다"고 표를 얻어간 국회의원들이 모인 여의도 국회의사당이다. 수직적이고 권위적인 방식으로 일하며 변화를 거부한다. 폐쇄와 고립을 상징하는 '갈라파고스'가 됐다. 도망갈 길 없이 노동에 시달리는 '섬노예'라고 자조하는 목소리도 들린다.
의원들의 갑질만이 다가 아니다. 의원실 피라미드 최하층에 위치한 청년 보좌진들이 넘어야 할 산이 하나 더 있다. 함께 얼굴을 맞대고 일하는 보좌관들이다. 각 의원실은 보통 9명의 보좌진이 한 팀을 이뤄 근무한다. 4급 보좌관 2명과 5급 비서관 2명, 6·7·8·9급 비서 각 1명에 인턴 1명 등이다.
숫자(급수)가 나타내는 서열은 위계와 갑질로 강력히 작동한다. 촘촘한 위계질서 속에 수많은 이가 고통을 삼키며 속으로 곪고 있다. 민주화를 외친 세력이나 보수적 가치를 좇는 이들이나 다를 게 없다. 국회 안 직장 문화만큼은 여전히 구시대적이란 지적이다.
의원은 의정활동과 지역구활동 등으로 자주 자리를 비운다. 자연스레 보좌관이 의원실의 실무를 책임지게 된다. 의원을 지근거리에서 보좌하고 정보까지 공유하는 보좌관들이 갖는 권한은 막강하다. 인사권에 자금관리권까지 보좌관들이 움켜쥐고 있는 경우가 많다. 한 바른미래당 의원실 보좌관은 "비서관과 비서의 경우 보좌관 선에서 채용하고 의원에게 보고만 하는 경우도 많다"고 말했다.
양 손에 권한을 쥔 이들이 개인 업무를 부탁하거나 부당한 지시를 내려도 항의하기 쉽지 않다. 대표적 갑질은 업무 미루기다. 연말정산 등 개인적인 일을 부하 직원들에게 시키는 것은 물론, 자신의 업무까지도 미루는 경우가 적잖다.
한 야당 의원실 비서관은 "오전 회의만 적당히 하고 나서는 사라졌다가 낮술을 잔뜩 하고 와서 자는 경우가 잦다"며 "결국 업무는 '아랫것들'이 모두 해결해야 하는 경우가 더 많다"고 말했다.
각종 감정노동도 비서관·비서들의 몫이다. 한 국회 기획재정위원회 소속 의원실 비서는 "(보좌관이)일이 잘 안 풀리거나 의원에게 질책 당하면 바로 우리에게 불똥이 튄다"며 "업무에 대해 공조하거나 하지도 않고서는 '너흰 대체 뭐하냐'고 역정을 내는 식"이라고 하소연했다.
지난 7일에도 페이스북 커뮤니티 '여의도 옆 대나무숲'에는 보좌관의 갑질을 고발하는 글이 올라왔다. 글쓴이는 "보좌관님과 함께 했던 시간이 힘들었다"며 올린 글에서 "아침마다 얼굴, 몸매, 옷, 화장 평가, 욕하면서 소리 지르기, 컴플렉스 매일 언급하며 놀리기 등을 당했다"고 호소했다. 다른 직원 욕하기, 야한 농담, 영감(의원) 노릇 등도 비서관·비서들이 흔히 당하는 갑질로 꼽았다.
업무와 관련 무시와 모독을 당하기도 한다. 한 여당 의원실에서 SNS 관리 등 홍보를 담당했던 전직 비서는 "보좌관으로부터 '허접한 일'·'아무나 하는 일 하는 애'라는 폭언을 여러 차례 들었다"며 "직책과 직위에 따라 일이 다른 것 뿐 아니냐"고 토로했다.
국회 밖의 '갑질'에 대해서는 발빠르게 대응하지만, 보좌관-비서관-비서-인턴으로 이어지는 국회 안의 먹이사슬은 쉽게 깨지지 않는다. 국회는 지난 1월 공관병 갑질로 논란을 빚은 박찬주 전 육군 대장의 이름을 딴 '박찬주법'을 발의했다. 부하에게 직무 관련성 없는 지시를 내리는 상관에 대한 처벌을 강화하는 법(군형법 개정안)이다.
이 외에도 각종 갑질 방지를 위해 사회 곳곳의 문제를 듣고 살피지만 정작 국회 의원회관에서 벌어지는 갑질에는 눈을 감는다는 지적이다. 한 국회 환경노동위원회 소속 의원실 비서관은 "갑질 방지 법안을 만들고, 통과되는 것을 보면서 남는 것은 뿌듯함보다 자괴감"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