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0세기까지만 해도 혈우병 환자는 오래 살지 못했다. 중증·중등도 환자 기대수명은 14~16년이었다. 40살 넘어 생존하는 경우가 드물었다. 그러나 이제 혈우병 환자가 오래 살지 못한다는 것도 옛말이다. 치료제가 발달하면서 보통 사람(비혈우인)과 기대수명이 비슷해졌다. 수명이 길어지면서 혈우병 환자가 만성질환도 앓게 되는 게 문제다. 고혈압·당뇨 등 심혈관 질환이 대표적이다.
김효철 전 아주대의료원장은 "국내 혈우병 환자 86%가 15~80세이다"며 "현재 성인인 혈우병 환자는 일반인과 같은 생존율을 보이기에 만성질환에 더욱 심하게 노출될 수 있다"고 경고했다.
김효철 원장은 50년 가까이 혈우병 치료와 연구에 매진한 권위자다. 아주대병원 정년 퇴임 이후 혈우병 단체의 요청에 따라 '김효철이상훈내과'를 서울 송파구에서 개원해 환자를 계속 진료하고 있다. 같은 의원에서 김소연·이상훈 원장이 김효철 원장과 함께 혈우병 환자 진료를 책임진다. 최근 머니투데이는 세 원장을 같이 만나 국내 혈우병 환자의 현황과 치료 환경 개선을 위한 제언을 들었다.
혈우병은 혈액응고인자가 부족해 지혈이 안 되는 병이다. 13개 혈액응고인자가 있는데 8인자가 부족하면 A형 혈우병, 9인자가 부족하면 B형 혈우병이다. 주로 어머니의 X 염색체 영향을 받은 남자아이에게서 발병한다. 드물지만 가족력이 없어도 발병하거나 여성이 걸리는 경우도 있다.
김소연 원장은 "혈우병 환자에게 가장 큰 문제가 바로 출혈이다"며 "관절 등 깊은 곳에서 출혈이 지속되면 관절병증에 의한 장애가 나타나는데 보행을 비롯한 일상생활이 어려워지고 굉장히 심한 통증을 겪는다"고 말했다. 김효철 원장도 "현재까지 혈우병 환자에게 가장 문제가 된 합병증이 바로 관절병"이라며 "현재 40~60세 나이대 환자분에게 관절 질환이 많다"고 설명했다.
고령의 혈우병 환자는 관절 합병증뿐만 아니라 고혈압·고지혈증·당뇨와 같은 만성질환을 겪을 수 있다. 김소연 원장은 "특히 혈우병 환자는 관절 등 이유로 운동이 상당히 부족하고 그로 인해 비만인 경우가 많다"며 "최근 데이터에 의하면 혈우병 환자의 고혈압 유병률이 일반인보다 1.9배 높았다"고 말했다.
혈우병 환자의 심혈관 질환 관리는 비혈우환자에 비해 연구가 많이 되지 않았다. 당뇨·고지혈증 약을 혈우병 치료제와 같이 투약해도 문제가 없는 것으로 알려졌다. 다만 혈우병은 피가 응고되지 않는 병이라 혈전이 생기는 질환에서는 항응고제 등 약을 신중하게 사용해야 한다.
이상훈 원장은 "일반적으로 동맥경화 말기에는 혈전으로 혈관이 막히는데 혈우병 환자는 그보다는 혈전이 생기는 단계에서 약을 잘못 사용해 혈전용해제나 항응고제가 오히려 출혈을 일으킬 위험이 있다"며 "경증 환자에게서는 이런 약을 사용할 순 있지만 수시로 체크하기 어려우므로 전문가의 판단이 필요하다"고 설명했다.
최근 혈우병 치료는 개인 맞춤형으로 진화하고 있다. WFH(세계혈우연맹)는 환자 개인의 생활패턴과 출혈 양상, 약물 반감기 등을 고려해 약물을 투여하도록 권장한다. 기존에는 환자의 혈액응고인자 농도를 1% 이상 유지하도록 권장했는데 최근 가이드라인에서는 권장 농도를 3% 이상으로 높이도록 개정했다.
국내에선 지금까지 보험 급여 문제로 환자에게 고용량 혈액응고인자 제제를 처방하기 어려웠다. 기존의 WFH 권장 농도인 1% 이상을 맞추기 힘들었다. 다행히 지난 8월 보험 급여가 확대되면서 환자 개인에 맞춰 더 높은 용량의 처방이 가능해졌다.
김효철 원장은 "국내 보험에서도 최저 혈액응고인자 농도의 중요성을 인정해 준 것"이라며 "최저 농도 1% 이상을 유지하면 결국 연간 출혈률도 줄어든다"고 설명했다.
김소연 원장은 "보험 급여 확대는 그동안 용량이 부족해서 출혈이 발생했던 환자에게 희소식이다"며 "최저 수치가 1% 아래로 내려가면 출혈이 나타나므로 약물동태학 검사로 환자의 투여 용량을 높이면서 출혈을 방지할 수 있게 된다"고 부연했다.
국내 혈우병 치료는 대부분 보험이 적용돼 환자 부담이 적다. 그럼에도 사각지대가 존재한다. 김효철 원장은 "수입이 일정 수준을 초과하면 보험 급여를 100% 받을 수 없고, 자기 부담금을 내야 하는 경우가 생긴다"며 "기존에는 1년에 500만원을 환자가 부담했는데 올해는 부담금이 780만원으로 확대됐다"고 말했다.
충분한 수입이 있는 환자가 아니지만 정부가 정한 기준에서 벗어났기에 본인 부담금이 발생하는 것이다. 약을 자기 돈으로 부담하다 보니 오히려 원래 받아야 할 치료를 다 받지 못하는 환자 사례도 있다.
이 원장은 혈우병 환자의 만성질환 문제가 곧 수면위로 올라올 것이라고 경고했다. 그럼에도 이 문제에 관심을 갖는 의료진이 부족하다고 지적했다. 그는 "환자가 점차 늙어가면서 80세 이상 비율이 확대될 것"이라며 "현재는 젊은 혈우병 환자만 치료하지만, 이제는 추세가 달라질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고령 혈우병 환자가 늘어나지만 정작 이들을 치료할 수 있는 환경은 잘 갖춰지지 않았다. 보험 삭감 이슈 등으로 대형병원조차 혈우병 환자 치료에 부담을 느끼는 상황이다. 김소연 원장은 "혈우병 환자는 전국적으로 있지만 치료할 수 있거나 약이 구비된 병원은 전국적으로 많지 않다"며 "소아청소년과에는 혈우병 선생님들이 많이 계시지만 내과에선 봐주는 선생님들은 턱없이 부족하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