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 마라톤 열풍..CEO가 솔선수범
여성·외국대학 출신 등도 흡수 "땀흘리는 일체감 만든다"
2005년 크리스마스 이브 오후, 현대중공업 K차장은 울산공장 주변을 승용차로 순회하다 인근 방파제로 향했다. 서울은 연말연시 축제분위기였지만 업무차 지방에 홀로 남게 돼 울적한 마음을 달래려 바닷가를 찾았다.
방파제 인근의 날씨는 흐리고 안개가 낀 상태였다. 10미터 앞이 희미한 가운데 바다를 바라보며 담배를 꺼내무는데 둑을 따라 노인 한명이 러닝셔츠 차림으로 달려오고 있었다. 거리가 가까워질 수록 노인은 낯설지 않게 보였다.
그는 민계식 부회장이었다.
세계 최고의 조선사로 평가받는현대중공업(243,500원 ▼4,500 -1.81%)을 오늘날의 모습으로 이끌어 온 민 부회장은 환갑이 넘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최근에도 한달에 한번 마라톤 풀코스를 뛴다. 민 부회장은 "어떤 일을 하더라도 체력이 바탕이 돼야 한다"는 원칙에 따라 자기관리에 철저한 마라톤 CEO로 불린다. K차장은 이후 마라톤을 시작했다.

최근 재계에서는 민 부회장과 같이 '달리는 CEO(최고경영자)'가 늘고 있다. 사장이 '달리기 시작'한 회사에서는 직원들도 앉아 있지 못한다.
서강호한솔CSN(2,675원 ▼55 -2.01%)대표(57)는 오는 16일 열리는 제111회 미국 보스턴 마라톤 대회에 출전한다. 그는 지난해 10월 춘천 마라톤대회에서 3시간39분 1초라는 공식기록으로 풀코스 완주에 성공해 55~59세의 연령대에서 3시간 45분으로 제한하는 대회참가 자격 기준을 통과했다.

신헌철SK㈜ 사장(62)도 보스턴 마라톤 참가자격(60~64세)을 갖춘 마라톤 CEO로 유명하다. 신 사장은 지난 18일 서울국제마라톤대회에서 3시간57분13초의 기록으로 4시간대 벽을 돌파했다. 그는 임직원들에게 기회가 있을 때마다 "달리면서 계속 자기 몸 상태를 점검하는 자기관리처럼 기업 구성원과 자원에 대한 관리도 중요하다"고 역설한다.
구자준LIG손해보험부회장은 직원들과 업계 관계자들을 위해 아예 마라톤 대회를 만든 CEO다. 구 부회장은 지난 2일 잠실 올림픽 주경기장에서 'LIG 제5회 코리아오픈 마라톤'을 개최하고 직원들과 함께 땀을 흘렸다.
현대차그룹의 계열사인 위아(옛 기아중공업)는 산업계에서 '마라톤 기업'으로 불린다. 이 회사의 마라톤동호회는 지난해 명성이 높은 16개 국내대회 상위권 마스터스 부문을 모두 석권했다. 국내에서는 가히 '최강'이라 불릴 만하다. 물론 이 같은 명성의 배후에는 직원들에게 "너를 위해 달리라"고 강조하는 김평기 부회장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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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부회장은 '나와 사회를 위해 달리는 마라톤'을 통해 얻은 경영철학을 바탕으로 기아부도의 파도에 휩쓸렸던 위아를 매출 2조원이 넘는 우량기업으로 변신시켰다.
마라톤 열풍 분위기는 산업계의 행사도 바꿔놓았다. 철강업계도 이 같은 사례에 속한다. 한국철강협회는 제8회 철의날을 기념해 오는 5월20일 여의도 한강시민공원에서 마라톤 대회를 연다. 이 행사에는 이구택포스코(269,500원 ▼6,000 -2.18%)회장과 이수일동부제강(4,930원 ▼150 -2.95%)사장 등 업계 대표들이 모두 참여해 중국 등 후발국의 도전에 직면한 철강산업의 재도약을 다짐할 예정이다.
인사조직문화의 전문가들이 재계의 마라톤 열풍을 바라보는 시각은 긍정적이다.
이상우 삼성경제연구소 연구원은 "과거 우리 기업계의 문화는 군대를 다녀온 남성들이 음주 등을 통해 업무 외의 생활에서도 상명하복식 체계를 공고히 하는 식이었다"며 "이에 비해 마라톤이나 사회봉사 등을 통해 자신과 사회에 대해 관심을 갖는 기업문화는 여성이나 외국 대학 출신의 조직구성원을 흡수해 조직일체감을 높이는 긍정적인 작용을 한다"고 분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