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동희의 思見(사견)]이건희 선대회장 6주기를 추모하며

1996년, 한국의 한 기업가가 미국의 젊은 기업가에게 편지 한 통을 보냈다. 편지에는 한국의 미래에 관한 세 가지 구상이 담겼다. 모든 한국인을 초고속 인터넷으로 연결하고, 비디오게임을 한국의 기술 성장을 이끌 산업으로 키우며, 세계 최초의 비디오게임 올림픽을 만드는 데 도움을 달라는 것이었다.
편지를 보낸 이는 오늘(25일)로 타계 6주기를 맞은 고(故) 이건희 삼성 선대회장이고 편지를 받은 이는 오늘날 인공지능(AI) 시대를 이끄는 전세계 시가총액 1위인 엔비디아의 젠슨 황 최고경영자(CEO)다.
지난해 한국을 방문한 젠슨 황 CEO는 이 편지를 받은 것이 한국과의 인연의 시작이었다고 회고했다. 당시 부도직전의 작은 그래픽칩(GPU) 업체였던 엔비디아는 이 편지를 받고 한국 용산전자상가를 방문해 명함을 돌리며 영업을 해 부도위기를 넘겼다. 한국의 PC방과 e스포츠가 없었다면 오늘날의 엔비디아도 없었을 것이라고 젠슨 황이 감사를 표한 이유다. 30년 전 미래의 가능성을 본 이 선대 회장의 판단이 오늘날 AI 시대의 세계적 기업과 삼성의 공동 발전으로 이어졌다.
같은 해 가을, 이 회장은 또 다른 가능성에 주목했다. 1996년 10월 경기도 포천의 일동레이크 골프장에서 열린 삼성월드챔피언십에 당시 막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프로에 데뷔한 박세리 선수를 출전시킨 것이다.
세계 정상급 선수 20명만 참가자격이 있는 이 대회에 주최 측이 가진 1장의 와일드카드(예외적인 기회를 제공하는 카드)를 박 선수를 위해 사용토록 한 것이 이 선대 회장이다. 아니카 소렌스탐과 캐리 웹 등 당시 세계 1·2위들과의 경쟁에서 3위를 차지한 박 선수는 이 대회를 계기로 미국 무대에서도 통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얻었다고 한다.
그는 이후 이 선대 회장의 지시로 구성된 삼성의 '세리팀'의 지원 아래 미국여자프로골프(LPGA) 투어에 도전해 25승을 거두며 명예의 전당에 올랐다. 그의 성공은 IMF(국제통화기금) 외환위기로 시름에 빠진 국민들에게 용기를 준 것은 물론 이른바 '세리 키즈'의 등장으로 이어져 한국 여자골퍼가 지금까지 224회(고 구옥희 선수의 1승 제외)의 우승을 차지하며 세계 무대에서 활약하는 토대가 됐다. 두차례 여자골프 올림픽 대표팀 감독을 맡았던 박 전 감독이 여러 방송에서 "오늘의 박세리가 있게 한 사람 중 한 분이 이건희 회장님이다"라고 말한 이유다.
젠슨 황과 박세리의 공통점은 이 선대 회장이 아직 결과가 보장되지 않은 먼 미래의 가능성을 먼저 알아보고 그것이 현실이 되도록 기회를 제공했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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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분기 영업이익 100조원을 넘어서는 반도체 사업에 이 선대 회장이 주목한 이유도 같은 맥락이다. 그는 '이건희 에세이 생각 좀 하며 세상을 보자'에서 반도체 사업에 관심을 가진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1973년 오일쇼크를 겪으며 자원이 부족한 한국이 선진국과 경쟁하려면 부가가치가 높은 하이테크 산업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생각했고, 산업사회에서 정보화사회로 넘어가는 시대의 핵심에 반도체가 있다고 판단했다. 1974년에 한국최초의 전공정 반도체 회사인 한국반도체를 사재로 인수한 이유였다."

단순히 새로운 사업에 대한 관심이 아니라 반도체가 국가와 기업의 경쟁력을 좌우할 것이라는 전망 아래 장기간 투자하고 기술을 축적한 결과가 오늘날 삼성의 반도체 사업의 밑바탕이 됐다.
삼성 계열사 사장들이 이 선대회장에게 자신의 실적을 열심히 자랑하는 보고자리에서 늘 돌아오는 건 칭찬보다는 "5년 후, 10년 후에는 뭘 먹고살 건데?"라는 질문이었다. '멀리 보고, 깊이 보라'는 그의 말은 사업의 본질과 변화의 방향을 먼저 파악하라는 요구였다.
리더의 역할은 실적을 점검하고 지시를 내리는 데서 끝나지 않는다. 조직이 아직 묻지 않은 질문을 먼저 던지고 구성원들이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전제를 흔들며 다음 변화에 대비하도록 만드는 것이다. 이 선대 회장은 30년전에도 그랬듯이 지금도 후배들에게 30년 후의 미래에 대해 질문을 던지고 있다.
그가 세상을 떠난 지 6년이 지난 지금, 삼성은 산업사회에서 정보화사회로의 전환보다 더 큰 AI시대 변화에 직면해 있다. 삼성전자는 분기 이익 100조원을 넘어서는 사상 최고의 실적을 구가하고 있다. 이 선대 회장이 살아있었다면 호실적으로 성과급 나누기에 몰두하며 갈등을 빚고 있는 삼성을 향해 일갈했을 듯하다.
"우리가 1등 하는 제품들이 5년 후면 다 사라질텐데, 그 땐 뭐 먹고 살 건데?"라며 삼성의 기술·조직·인재가 30년 후의 미래를 위해 준비돼 있는지 물을 듯하다.
이건희의 시대와 이재용의 시대는 다르다. 선대 회장이 일본과 미국의 선진 기업을 추격하며 삼성을 세계 정상에 올려놓았다면 오늘의 삼성은 누구를 따라갈 것인지보다 어떤 기술과 시장을 먼저 개척할 것인지를 스스로 결정해야 한다. 과거의 성공 방정식을 그대로 대입한다고 미래의 성공이 보장되는 것은 아니다.
아버지의 위대함을 증명하려 하기보다 그가 일군 삼성이 과거의 성공에 기대지 않도록 하는 것. 그것이 이 선대 회장 6주기에 되새겨야 할 과제가 아닐까 싶다. 이건희의 시대를 되살리는 것이 그를 추모하고 계승하는 일은 아니다. 이건희 선대 회장이 타성에 빠져있던 삼성과 한국 사회를 바꾸려 했듯 이재용 회장도 새로운 시대의 변화를 이끌기를 기대한다.